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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의 물건들] 친구에게 빌려주면 안 되는 물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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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에서 매주 수요일,
은희경 소설가의 사물에 얽힌 이야기 '은희경의 물건들'을 연재합니다.



만화경을 본 적이 있는지? 어릴 때 나는 동화책을 통해 처음 만화경을 알게 되었다. 직접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 시절 보석을 본 적이 없는데도 '보석 같은'이라는 표현에서 아름다움과 고귀함을 느낄 수 있었듯이, 만화경 역시 나에게 상상만으로 신비함과 다채로움을 떠올리게 해주는 단어였다. 왜 아니겠는가. 어린이는 아직 쓸데없는 정보는 학습되지 않았고 편견을 가질 만한 시간을 살지도 않았으므로 수많은 것을 상상해 낼 수 있는 능력자이다. 그리고 순수하고 착한 상상만 하는 게 아니다. 때로 비밀스러운 악의도 떠올린다. 어른들은 어린이를 고정관념 안에서 해석하고 그 선입견을 굳히기 위해 때로 자신의 어릴 때 모습은 다 잊은 척하는데, 작은 인간인 어린이들은 더욱 섬세하게 이해받을 필요가 있다.

어릴 때 내가 은밀하게 악의를 실현시키는 방법은 일종의 주문 형식이었다. 

'운동장 조회 시간마다 공깃돌로 내 등을 맞추는 놀이를 했던 남자애들, 너희들은 선생님한테 매를 백 대쯤 맞게 된다, 수리 수리 마수리'

'비오는 날 나한테 흙탕물을 끼얹고 그냥 지나친 자전거 탄 아저씨, 가다가 바퀴에 빵꾸나 나라, 얍' 

이런 건 내심 당당함이 있는 악의였다. 그러나 '나를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라고 꾸준히 주장했던 이웃 할머니가 아프시다는데 감기야, 힘 내, 할머니 곁에 오래 있어줘' 같은 주문은 이내 죄책감을 느끼고 철회해야 했다.

어린이는 정의로운 존재이므로 뜻밖에도 죄의식을 많이 느낀다. 그리고 자신이 나쁜 사람일까봐 두려워하는데 그것은 어른들이 아이들을 다루기 쉽게 하기 위해서 '착한 어린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어 겁을 주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일 때는 누구나 자신이 착하다고 믿고 싶어합니다. 왜냐하면 착한 아이만이 어른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꾸중을 들을 때마다 큰 소리로 우는 아이들만 봐도 알 수 있죠. 그 애들은 잘못을 뉘우치는 게 아닙니다. 혹시 자기들이 착하지 않은 아이일까봐 겁이 나서, 아니면 자기를 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게 억울해서 우는 거죠. 아이들에게는 자기가 착하지 않은 아이로 보인다는 사실이야말로 사랑받을 수 있는 밑천, 생존의 조건을 잃어버리는 일이거든요. 사랑을 원하는 것은 모든 약한 존재들의 생존 본능이니까요."

내 소설 속 이 구절은 어린 시절 품었던 나 자신의 악의를 두둔하기 위한 건지도 모르겠다. 혹은 오랜 시간 꾸준히 착한 아이로 행세했던 그 시절 나의 간교함(?)에 대한 변명일 수도 있다. 나의 최고 극비 사항이기도 했는데, 내 생각에 나는 결코 어른들이 믿고 있듯 착한 아이가 아님은 물론이고 잘도 어른들을 속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친구에게까지 악의적인 상상을 사용한 데에는 계기가 있었다. 어느날 일제고사(이 조선왕조실록 시절의 단어가 떠올라버려서 나도 나에게 놀라는 중)를 앞두고 시험공부를 하겠다는 나에게 심부름을 시키면서 동네 아저씨가 이렇게 말했다. 

"시험 전날은 공부하는 거 아니야. 공부 잘하는 친구 집에 놀러 가야지. 그 친구가 시험 공부를 못하도록 방해해야 돼." 

그때 나는 엄청난 삶의 진리를 깨달았는데 다른 사람이 못해야만 내가 잘한다는, 아니 잘한 셈이 된다는 사실이었다. 경쟁이라는 개념을 잘못 배운게 틀림없다.

그때 이후 나는 시험 날마다 필사적인 노력을 해야 했다. 공부 잘 하는 친구의 어깨를 짚지 않도록. 시험 날 누군가 어깨를 짚으면 미역국 못지 않게 시험을 망치는 데 효과가 있다지 않은가. 행여 그 나쁜 짓을 하게 될까봐 내 두 손을 꼭 부여잡고 있는데, 그동안에도 머릿속의 상상은 계속되었다. 다른 아이의 손이 친구의 어깨를 스칠지 모르잖아. 계속 지켜보아야만 해. 그때 친구가 이렇게 물어온다면. "왜 그렇게 쳐다봐? 내 어깨에 뭐 묻었어?"그러면 나는 "아니" 하면서 무심코 어깨를 툭 치는 것이다... 다음 순간 나는 가슴 앞에 두 손을 부여잡은 채로 세차게 도리질을 해야 했다. 

그 무렵 읽은 동화 중에 소원을 들어주는 호리병 이야기가 있었다. 아마 원작은 로버트 스티븐슨의 『병 속의 악마』일 것이다. 주인에게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주는 대신 죽은 뒤에는 지옥불로 떨어뜨린다는, 축복과 저주의 마법이 동시에 깃든 호리병. 그 저주를 벗어나는 방법은 한 가지. 자신이 샀던 것보다 싼 가격에 그 호리병을 되팔아야만 한다. 부귀영화의 단맛에서 깨어난 주인들은 필사적으로 호리병을 팔아 치우려 하고...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어찌어찌해서 그 호리병을 단돈 1원에 샀다면? 그럼 지옥불을 피할 방법은 없다. 물론 지옥을 굳게 믿었고 돈도 없었던 어린 나는 아무리 소원을 이루어준다 해도 그런 께름직한 호리병을 살 일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나. 내가 읽은 동화 버전에서는 호리병을 팔아야 하는 게 아니었다. 친구의 주머니에 몰래 옮겨 넣어서 저주를 덮어씌우는 걸로 각색돼 있었다. 나에게 호리병 살 돈은 없지만 반 친구는 60명 넘게 있지 않은가. 이미 경험을 통해 인간의 머릿속 악의를 파악하고 있던 나는 세상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특히, 뭔가 가진 듯이 보이는 아이를 경계했다. 그애가 소원을 이룬 다음에 몰래 호리병을 갖고 내 주머니를 노릴까봐 한동안 주머니를 봉하듯 손을 깊숙이 집어넣고 다녀야 했다. 그 결과 품행이 방정하지 않다고 선생님에게서 꾸중을 듣는 자존심 상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악의에 대한 상상이 실제로 나에게 나쁜 일을 불러왔다는 권선징악적 해석이 가능한 부분이다.

악의는 종종 금기와 연결되기도 한다. 

"해를 똑바로 보면 눈이 먼다."

그 말을 들은 이후 나는 해를 똑바로 보지 않으려 애쓰는 한편, 그 사실을 모르는 누군가가 배짱을 과시하다가 눈이 멀어버리는 상상을 하며 햇볕이 쨍쨍한 날 얼마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던가. '나를 향해 달려오는 기차는 죽음을 뜻한다' 성인용 주간지에서 엉터리 꿈 풀이를 읽은 다음에는 잠들기를 두려워한 나머지, 친구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어 두려움에 동참시키고 싶은 유혹을 이겨내려고 노력해야 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비슷한 경험을 할 때가 있다. 외진 댐 근처를 걷다가 수문에 붙은 '절대 열지 마시오'라는 경고문을 보았을 때, 낯선 건물의 계단참에서 마주친 수상한 문 손잡이 위의 '돌리지 마시오'라는 문구, '출입 금지', '접근 금지', '촉수 엄금' 같은 경고문들. 더구나 그것이 휘갈겨쓴 손글씨일 때, 게다가 맞춤법이 틀렸을 때, 금기를 넘어 비밀에 접근하려는 나의 상상력이 가동되기 시작된다. 그리고 그때마다 몹시나 어른스럽게 그 호기심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어린 시절에 악의를 시뮬레이션했기 때문이 아닌가 짐작해 본다.

그래서, 만화경 이야기는 언제 나오냐고요? 그러게 말입니다.

나의 만화경은 일본 여행 중 오타루에서 산 것이다. 기념품 거리에서 만화경 가게를 발견했을 때 나는 적잖이 흥분했다. 내 어린 시절 동화 속에 존재했던 만화경. 풍물장수 노인의 허락을 받은 선택된 아이들만 렌즈에 눈을 갖다 댈 수 있는 신비로운 이야기. 염탐과 비밀과 금기와 짜릿한 최면을 상상하게 만들었던 물건.

만화경에 눈을 대고 보면 시시한 일상적 풍경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마치 살아움직이는 듯한 아름다운 무늬가 나타났다. 또 만화경을 조금씩 돌리는 데에 따라 끊임없이 또다른 문양이 나타나서 퍼져나갔다 오므라들었다 하며 갖가지 형태로 변형된다. 

그야말로 요지경. 사물의 미미한 형태와 색의 파편을 연결시키고 왜곡해서 문자 그대로 만 가지의 풍경을 연출해내는 것이다. 나는 그 중에서 적당히 고급스럽고 특이한 색깔이면서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사이즈의 만화경을 골랐다. 오랜만의 설렘이었다. 포장한 상자를 건네주며 안목을 칭찬하는 주인의 의례적인 말에 나는 짐짓 어린 시절의 천진한 웃음으로 보답했다.

집에 와서 상자를 열어보니 만화경과 함께 작은 쪽지가 들어 있었다. 기하학적 문양을 마음껏 즐기되, 이 만화경으로 태양을 보면 시력을 잃을지 모른다고 경고하는 내용이었다. 순간 내 머릿속에는 나쁜 상상이 떠오르고 말았다. 어린 시절의 소환이 악의의 상상까지 불러낸 것이다. 그러니 내가 그 멋진 만화경을 갖고 나가 자랑하지 못하도록 위험한 물건처럼 서랍 깊숙이에 넣을 수밖에. 시험 날 친구의 어깨를 짚지 않기 위해 애쓰는 그 가상함으로. 

금기 너머를 상상하는 것과 사소한 악의를 품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것들을 제어하는 자유 의지가 있지 않은가. 소설 『병 속의 악마』의 결말은 주인공과 아내가 서로 저주의 호리병을 차지하려고 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아내가 남편의 저주를 대신 떠안기 위해 사람을 시켜서 남몰래 자신의 호리병을 샀다는 걸 알게 된 주인공이 아내에게서 그 저주를 되찾아오려고 하는 것이다. 결국, 가장 최상위의 자유 의지인 '사랑'이 탐욕의 비극을 해결해낸 모양이다.

오랜만에 서랍 정리를 하다가 이 만화경을 발견했을 때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밴드 '국카스텐'을 좋아해서 그의 이름이 새겨진 티셔츠까지 맞춰 입고 공연을 따라다니던 친구. 국카스텐이 만화경이라는 뜻이라는데, 그녀는 내 만화경을 보자마자 태양을 피하는 법도 없이 다짜고짜 눈에 댔을 게 틀림없다. 

친구야, 알고 있니. 내가 너의 눈을 지켜냈어. 물건을 빌려주지 않음으로써. 어때, 고맙지?

다음 이야기는 '다음 중 내 연필이 아닌 것은?'이다.



병 속의 악마
병 속의 악마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 김세미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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