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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의 물건들] 다음 중 나의 사치품이 아닌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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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에서 매주 수요일,
은희경 소설가의 사물에 얽힌 이야기 '은희경의 물건들'을 연재합니다.



"내가 일하는 찻집에서는 손님들이 놓고 간 물건을 카운터 서랍에 보관해둔다. 그 여자 손님의 수첩도 거기 들어 있었다."

이것은 내가 쓴 단편 소설의 시작 부분이다. 그 수첩은 이렇게 묘사된다.

"품위 있는 광택이 나는 검은색 소가죽이었고 오른쪽 귀퉁이에서 몽블랑 고유의 엠블럼인 육각형 눈의 결정이 흰색으로 차갑게 빛났다. 펼치면 왼쪽에 부드러운 물결 무늬의 카드 홀더가 두 칸, 오른쪽에는 작은 분리형 수첩이 끼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갈피에 역시 흰색 눈의 결정이 새겨진 매끈한 검은색 소형 볼펜이 오만하지만 성실한 자태로 얇은 가죽에 감싸여 꽂혀 있는 물건이었다."

지금 이 대목을 찾아 읽는 내 마음이 씁쓸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처럼 자세히 그려낼 수 있었다는 건 실물을 눈앞에 놓고 보면서 썼다는 뜻인데, 지금은 이미 잃어버리고 없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명함 지갑만한 그 수첩을 세 번이나 잃어버렸다.

첫 번째는 소설에서처럼 찻집에 놓고 왔다가 되찾았다.(소설 속의 미스테리한 여자는 찻집에 다시 나타나지 않지만 현실에서의 나는 잔뜩 울상을 지은 채 급히 그곳으로 뛰어갔다고 한다)

두 번째는 버스에서 떨어뜨린 걸 시민 의식이 투철하신 승객이 주워서 돌려주었다. 그런데 수첩에 끼워져 있던 명함을 보고 연락을 해왔다... 그게 무슨 의미이겠는가.

"신기하네요. 제가 작가님을 실제로 만나는 건 처음이거든요."

"아, 네에."

이런 대화가 오가는 중에 나는 그분이 말하는 '작가님' 앞에 분명히 '칠칠하지 못한', '정신머리 없는' 같은 단어가 생략돼 있을 거라 생각했고, 어떻게 하면 '업계'의 이미지를 회복시킬 수 있을지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짐짓 품위 있고 이지적인 표정을 짓는 한편으로 고마운 마음이 충분히 표현되도록 한껏 입가를 올렸는데, 그때도 역시 울상이었을 것이다.(세 번째로 울상을 지을 일은 영영 일어나지 않았다)

수첩에 비하면 펜은 한층 더 잃어버리기 좋은 조건을 갖고 있다. 상습 분실사범인 내가 그 이점을 간과할 리가 없다. 펜을 쥘 줄 알게 된 이래로 얼마나 많은 펜을 잃어버렸던가. 그걸 안다면 아끼는 펜은 갖고 나가지 않아야 마땅하다. 그것이 내게는 몽블랑 볼펜이다. 적당한 무게감을 가졌으면서 부드럽게 미끄러지고, 글씨가 선명하고, 또 내 손에 맞게 길들여진 나의 사치 품목인 것이다. 그런데도 그것을 기어코 지니고 나가는 경우가 있다.

가령 인터뷰나 강연을 할 때인데, 이미지 메이킹을 위한 소품이 필요해서는 결코 아니다.(나이 덕분에 중후한 분위기는 이미 충분히 갖고 있다) 그 펜을 손에 쥐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든든해지기 때문이다. 마치 오랜 친구가 그곳에 따라와준 기분이랄까. 긴장을 덜 하게 된다. 또 한 가지 경우는 바로 내 책에 사인을 해야 할 때이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내 책을 원하는 독자에게 내가 아끼는 펜으로 이름을 적어주고 싶다. 또, 자기 책에 사인을 하는 건 작가로서 호사를 누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좀 호들갑스럽게 말하자면, 나의 호사를 독자에게 사치스럽게 전달하려는 마음이라고나 할까.

그런 마음으로 갖고 나간 몽블랑 볼펜을 독일의 낭독 행사에서 잃어버린 적이 있다. 내가 당황한 얼굴로 탁자 밑을 두리번거리자, 사정을 알게 된 독일 독자 한 사람이 자신의 펜을 내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대신 이걸 갖고 가세요. 오늘의 만남을 기억하게 해줄 거예요. 그리고 물건을 잃어버리면 그 장소에 다시 가게 된대요. 다음번에 꼭 다시 오시기 바랍니다."

그 말에 감동을 받은 나는 잠시 나의 사치품을 잃어버린 상실감과 비탄을 감추고 그분의 펜을 고맙게 받아 들었다. 그마저도 그 여행이 끝나기도 전에 잃어버렸지만. 상관없어요, 비록 물건은 없어졌지만 그날을 생생히 기억한답니다. 그리고 다시 가게 될 거란 말도 아직 잊지 않고 있어요...

상습 분실범인 나로서도 그 볼펜은 내가 잃어버린 물건 중 가장 값비싼 물건이 었을 것이다. 그만큼 학습 효과가 컸는지 그 뒤에 갖게 된 몽블랑 볼펜은 십 년 넘게 잘 지니고 있다.(내가 그럴 리가. 몇 번의 위기가 있었고, 가장 결정적인 위기는 몇 년 전 리스본의 한국 대사관 행사에 갔다가 잃어버린 일인데 다행히도 내가 탔던 관용차 안에서 발견되어 국제 우편으로 돌려받았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볼펜 외에도 몽블랑펜이 여러 개 더 생겼다.

두 개의 만년필은 작가로서 공식적으로 받은 물건이다. 하나는 김광섭 선생님의 호를 딴 '이산문학상' 수상자에게 주는 부상이고, 다른 하나는 교보문고 빌딩에 걸리는 '광화문 글판'의 선정위원을 마치며 받은 선물이다. 둘 다 사용하지 않은 새 만년필인데 나의 직계 가족 3대 중 원하는 사람이 없어서 아직 내 서랍을 지키고 있다. 내 이름까지 새겨져 있으니 분명 귀한 사치품일 텐데 말이다.

그 옆에 흰색 몸체에 우아한 금색 장식을 가진 두툼한 만년필은 셰익스피어 작가 에디션이다. 다른 두 개의 만년필에 각인된 내 이름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새겨진 것은 바로 셰익스피어의 사인. 프로모션 때에 그 만년필에 대한 글을 쓰고 받은 선물이다. 내가 저 화려한 셰익스피어 만년필에 잉크를 채워 글씨를 쓰는 건 딱 하나, 책에 사인을 할 때이다. 화려한 전과 때문에 역시나 집에서만 사용하지만 도서전 같은 특별한 날에는 과감하게 갖고 나가기도 한다. 사치스러운 물건으로 사치스러운 일을 하는 것이다.

다음 중 나의 사치품이 아닌 것은? 

이 질문의 답은 형광펜이다. '사치품'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가족인 K의 물건으로, 내가 외국의 면세점에서 사서 선물한 것이다. 물론, 나는 그에게 무려 몽블랑의 형광펜을 선물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탑승 시간을 얼마 남기지 않고 선물을 사러 뛰다시피 면세점의 첫 번째 가게인 문구점에 들어가 눈에 들어오는 첫 번째 펜을 가리켰을 뿐이었다. 나중에 영수증을 확인하고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비행기는 이미 떠난 뒤였다.

K에게 그것을 건넬 때 나는 이 선물로 만족시키지 못할 사람은 세상에 없을 거라고 내심 의기양양했다.(특히 가격면에서) 그런데 펜의 뚜껑을 여는 순간 갑자기 눈앞이 허전해졌다. 펜에 펜촉이 없는 것이다. 대신 유치한 색깔의 뭉툭한 색연필이 비죽 나왔다. 이런 유명한 브랜드에도 불량품이 있나. 조금 뒤에야 형광펜이란 걸 깨달았다. 아니, 누가 형광펜을 '품위 있는 광택이 나는 검은색'의, '고유의 엠블럼인 육각형 눈의 결정이 흰색으로 차갑게 빛나는' 고급 펜 속에 담아놓아요...

놀라움과 분노가 조금 진정된 뒤 K가 웃으며 말했다.

"볼펜이나 만년필도 아니고, 몽블랑 마커를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뚜껑을 열어서 보여주면 다들 재밌어할 거야."

나는 그 사치품에 개그 기능이 있다는 게 큰 장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첫 번째 관객으로서 예의상 하하 웃어 보였다. 뭐야, 사치품에는 기능이 많구나, 하면서. 사치품에는 여러 기능이 있지만 그 중에서 내가 자주 사용하는 것은 잃어버리는 기능일 거야, 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생각해보니 내 소설에서 몽블랑 만년필이 등장하는 대목이 또 있다. 무엇엔가 집착하는 걸 경계하는 주인공이 이렇게 말한다. 

"못 견딘다는 게 싫어. 갖고 싶어 못 견디겠다, 하고 싶어 못 견디겠다, 그리고 보고 싶어 못 견디겠다 따위."

그래서 아끼던 몽블랑 만년필을 잘못해서 화장실에 빠뜨렸고 어렵사리 꺼내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무언가에 집착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다시 그 자리에서 그대로 버려버렸다나 뭐라나. 지금이라면 결코 그렇게 쓰지 않았을 것이다. 아예 갖고 나가지 않았을 테니까. 

다음 이야기는 '떠난 사람을 기억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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