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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하지 않더라도 도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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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문장(안 이후 로소 보이는문장)

 

" 한때는 톰을 사랑한 적도 있었어. 그렇지만 당신 역시 사랑했어."

 

『위대한 개츠비』 F.스콧 피츠제럴드 저, 김영하 역/ 문학동네 167쪽

 

1.

 

우리 말 중에 특별한 이유 없이 그냥 끌리는 꾸밈씨들이 있는데 ‘도도하다’도 그 중 하나다. 사전적 의미로는 ‘거만하다’와 같은 부정적 느낌으로 풀이되지만 생활의 용례에서는 ‘시크하다’처럼 밉지 않을 만큼의 당당한 사람을 가리킬 때 쓰이기도 한다. 도도한 고양이를 상상하면 그 품새가 더 잘 그려지는데 비굴하지 않고, 자존감 충만한 것이 섹시하게까지 느껴진다.

 

소설 속에서 도도한 여자 캐릭터를 찾는다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겠지만 또 한 명을 꼽는다면 『위대한 개츠비』의 여주인공 데이지다. 엄밀히 말해 데이지는 도도함 보다는 한국에서 희화되는 ‘OO녀’에 가까울 정도로 사치와 허영, 변덕과 자기과시가 강한 여자겠으나 소설 거의 후반부의 한 장면으로 데이지는 도도녀가 될 자격이 충분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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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바즈 루어만’의 영화에서는 캐리 멀리건이 데이지 역할을 맡았다.

 

그것이 어떤 상황인지를 말하기 전에 우선 간단히 『위대한 개츠비』를 정리하자.

 

가난한 농부의 집안에서 태어나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개츠비는 그러나 늘 상류사회 진입을 꿈꾸며 우연한 기회를 잡아 이를 실현한다. 그는 상류층 여인 데이지를 사랑하고 그 사랑을 통해 자신의 신분이 영원히 상승할 것을 기대했으나 데이지는 귀족 출신 톰에게 홀랑 시집가버린다.

 

5년 동안 오매불망 데이지를 그리워하던 개츠비는 으리으리한 저택을 지어놓고 데이지의 관심을 끌기 위해 밤이면 밤마다 화려한 파티를 연다. 개츠비의 집은 누구나 가보고 싶은 그 동네 핫플레이스가 된다. 바다 건너 살면서 그 집을 늘 동경했던 데이지는 그 집을 방문하고, 그 곳이 다름 아닌 옛 애인의 집이라는 것에 대해 로또 맞은 듯한 충격에 빠지고, 옷장의 고급 셔츠들을 보며 눈물의 호들갑을 떨다가, 개츠비의 속삭임을 듣는다. “ 좋아? 그럼 가출해, 내게로 오면 이 저택은 네 거야.”

 

그러나 톰이 자기 아내를 빼앗길 만큼의 호구일 리가 없다. 개츠비를 뒷조사한 후 그의 구린 과거로 엿 한 방 크게 먹일 순간을 기다리고, 소설과 영화 공히 가장 긴박한 장면인 뉴욕 플라자 호텔의 스위트룸 사건을 맞이한다. 더위를 피해 하루의 집단 피서를 떠난 그 호텔방에서, 개츠비와 톰은 데이지 쟁탈 빅매치를 벌인다. 개츠비는 데이지에게, 지금 남편을 향해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라 하고, 이의 반격으로 톰은 준비했던 개츠비의 학력위조, 냄새나는 직업 등을 폭로한다.

 

이제는 데이지가 자신의 속마음을 밝힐 때이다. 옛날 애인인 개츠비를 사랑하는지, 아니면 지금 남편인 톰을 사랑하는지 그녀의 선택이 남은 시간. 이리갈까 저리갈까 고뇌하다 결국 흐느끼며 개츠비에게 말한다. " 한때는 톰을 사랑한 적도 있었어. 그렇지만 당신 역시 사랑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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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요런 불여시 데이지, 과거형으로 싹 말하며 두 남자에게 계속 희망고문을 하고 있으니. 그러나 나는 이 장면에서 매력이든, 미모든, 그것이 무엇이든, 믿는 구석이 있으니 선택의 결정적 순간에서도 저런 밀당력을 보이는 데이지에게 영악한 도도함을 본다. 데이지가 톰을 선택하든, 개츠비를 선택하든, 혹은 둘 다 포기하고 혼자 플라자 호텔방을 나가든, 그 모든 데이지의 선택은 그녀가 보인 눈물과 고민, 욕망 속에서 정당화된다. 다만 그녀는 끝까지 도도했기에, 남자들은 그녀를 쉽게 대하지 못했고, 개츠비 역시 파멸을 하면서 까지 ‘위대한’의 수식어를 붙일 만큼의 격정적 사랑을 데이지에게 보여준 것일 테다. 아무튼, 데이지 win!

 

2.

 

대선의 시국에 『위대한 개츠비』를 떠올린 것은, 유권자에게 표를 호소하는 후보들의 모습이 데이지를 사이에 두고 애정다툼을 벌이던 호텔 방 두 남자의 모습과 겹쳐보였기 때문이다.

 

촛불과 탄핵에서 이어진 조기 대선 때문인지 사람들의 관심은 그 어느 때 보다 더 선거의 과정과 결과에 몰입돼있는 것 같다. 친한 사람들은 만나면 노골적으로 누구를 찍을 것인지를 묻고 덜 친한 사람끼리는 상대가 누구를 지지할지 염탐한다. 택시를 타면 택시 기사가 승객의 정치적 성향을 눈치보고 승객은 기사의 한 마디에 촉각을 세운다.

 

나 역시 후보들의 TV 토론을 꼬박꼬박 챙겨봤다. 내 색시 고르는 마음으로, 호감 가는 후보는 매의 눈으로 보려했고, 비호감 후보라도 장점을 찾아보려 했다. 이전에는 이러지 않았다. 아니 후보들의 공약 하나를 꼼꼼히 챙겨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처음부터 내 편이 아니면 적(敵)이었다. 내 첫 대선은, 유시민 씨의 표현대로, 죽음을 각오하고 시위해서 투표권을 시민에게 돌려놨더니, '시민'이라는 사람들은 투표장에 가서 노태우를 뽑았다. 그 다음 대선은 삼당야합한 이가 대통령이 됐다. 청산되지 않는 과거와 쓰레기처럼 구겨진 미래를 원통해하며, 이십대의 나와 친구들은, 선거권을 막걸리와 바꿔먹은 어른들을 저주했고, 늙은이들에게는 투표권을 반만 줘야 한다고 푸념 했다가, 더 술이 취했을 때 누군가는 “마흔 넘으면 다 죽어야 해, 그래야 민주화가 돼”라며 울부짖었다.

 

그 말대로라면 죽었어도 10년 전에는 죽었어야 했을 내가, 또 한 번의 대선 투표를 앞두고 있다.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씨를 대통령으로 만든 1등 공신이 50대 라는 분석이 있었는데, 이제 내가 그 50대가 되었다. 언론에서 세대별 분석을 할 때 내 나이는 자연스럽게 보수 진영으로 분류가 된다. 시청 앞 태극기 화면이 자막 위를 덮는다. 그럴 때는 뭔가 좀 억울하기도 하고 나보다 젊은 사람들에게 눈치가 보이기도 하지만, 그 억울함과 눈치 보임의 정체를 표현하는 것이 영 구차하고 추례하다.

 

 

실제 나는 이번 선거를 앞두고 유권자로서 이전과는 뭔가 달라진 자신을 본다. 그것은 내 사람만 보이던 확증편향이 확실히 줄어 들었다는 것이다. 지지하되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을 수 있는 균형감, 내가 마음에 둔 후보가 실수를 했을 때 그것을 비판할 수 있는 객관성이 어느 정도 생긴 것 같다. 내 지인은 이것을 나이 먹으면서 생기는 자연적인 보수화라고 말했으나 내 식으로 말한다면 이것이 유권자의 도도함이다. 데이지가 그러했듯, 투표소 입장 전까지 “당신도 사랑했어, 그렇지만 당신도 사랑했어”라고 후보들의 간을 보고 긴장시키는 도도함 말이다.

 

다만 내가 누군가를 사랑했다고 할 때, 그 사랑의 이유를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말할 수 있는 유권자로 늙고 싶은 바람이다. 자기의 소신대로 찍는 것이 성숙한 투표라지만, 세상의 모든 유권자는 언제나 자신의 방식 안에서 소신적이었으며 소신의 알리바이를 모두 확보하고 있다. 수십 년 전에 고무신과 막걸리로 투표권을 팔아먹었던 사람들도 내 손 안의 콩고물이 최고라는 소신이 있었을 것이고, 지역주의와 빨갱이론과 가짜뉴스를 신앙처럼 섬기며 태극기를 두른 오늘의 애국 어르신들도 자신의 선택을 소신이라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다.

 

다만 ‘~카더라’가 아닌 자신의 철학과 주의를 토대로, 세월호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속죄를 하고 그 비극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대통령과 공모하여 나라를 사적 욕심으로 채운 이들에게 엄중한 책임을 묻기 위해서, 국가의 품격을 더 이상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서, 외교와 통일을 자주적으로 하기 위해서, 사람이 사람을 귀히 여기는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불통이 아닌 소통의 시대를 자식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내가 누군가를 선택했다면, 그 후보는 내 사랑의 이유가 될 것이고 그것을 합리적인 소신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젊어서 욕했던 그 나이를 막상 내가 먹고 보니, 노추(老醜)와 아집과 독선에 빠지지 않을 유권자로 늙어야 한다는 경계감이 더 커진다. 나의 판단이 둔해진다면 나는 더 많은 정보를 접하고 자신의 소신에 덜 오염된 내 자식과 손주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기를 또한 소망한다. ‘위대한 유권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도도한 유권자’로 죽을 때까지 남고 싶은 것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무심코 잘못 쓰는 한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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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_imagetoday

 

 

‘묘령의 중년 여성’이 ‘토사광란(吐瀉狂亂)’을 하다?
 

 

어느 글에서 위와 같은 표현을 대했습니다. 집 앞 골목에서 30대 후반인지 40대인지 분명치 않은 여인이 배를 감싼 채 뒹굴며 음식물을 토하고 있는 모습을 대하고서 적은 글이었는데요. 이 표현은 두 군데가 대단히 잘못된 문장입니다.

 

‘묘령의 중년 여성’은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워서 그런 표현을 쓴 듯합니다. ‘묘령(妙齡)’이란 ‘방년(芳年. 이십 세 전후의 한창 젊은 꽃다운 나이)’과 마찬가지로, ‘스무 살 안팎의 여자 나이’를 뜻하는 말이랍니다. 그러니, 묘령의 중년 여성이란 표현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 되지요. 묘령은 엄연히 스무 살 안팎의 나이를 뜻하는 말이라는 것, 꼭 기억해 두기 바랍니다.

 

‘토사광란(吐瀉狂亂)’은 어림짐작으로 잘못 쓴 말로, ‘토사곽란’의 잘못입니다. 배가 아파서 배를 움켜쥐고 미친 듯이 뒹굴면서 토하니까 마치 그게 광란(狂亂)인 듯만 해서 잘못 유추한 거지요.

 

‘토사곽란’은 어려운 말인데요. ‘토사’와 ‘곽란’이 합쳐진 말입니다. ‘토사(吐瀉)’는 ‘상토하사(上吐下瀉)’의 준말로 위로는 토하고 아래로는 설사하는 것을 뜻합니다. ‘곽란’은 배가 놀라고 아픈 한의학상의 병이고요. 그래서 토사곽란은 ‘위로는 토하고 아래로는 설사하면서 배가 질리고 아픈 병’을 뜻합니다.

 

이와 같이 한자어에의 쓰이는 한자의 정확한 의미를 챙기지 않아서 실수하기 쉬운 것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토사광란(x)/토사곽란(o); 동거동락(x)/동고동락[同苦同樂](o); 성대묘사(x)/성대모사[聲帶模寫](o); 부화내동(x)/부화뇌동[附和雷同](o); 유도심문(x)/유도신문[誘導訊問](o); 양수겹장(x)/양수겸장[兩手兼將](o); 산수갑산(x)/삼수갑산[三水甲山](o); 오합잡놈[烏合雜-](x)/오사리잡놈(o); 일사분란(x)/일사불란[一絲不亂](o); 절대절명(x)/절체절명[絶體絶命](o); 홀홀단신(x)/혈혈단신[孑孑單身](o); 동병상린(x)/동병상련[同病相憐](o); ‘풍지박산/풍지박살’x)'/풍비박산[風飛雹散](o); 호위호식(x)/호의호식[好衣好食](o); 주야장창(x)/주야장천[晝夜長川](o); 순국선혈(x)/순국선열[殉國先烈](o); 유관 검사(x)/육안[肉眼] 검사(o); 인상 실험(x)/임상[臨床] 시험(o); 체면불구(x)/체면 불고[不顧](o); 통산임금(x)/통상[通常]임금(o); 난상토론[難上討論](x)/난상토론[爛商討論](o); 옥석구분(x)/옥석 구분[玉石 區分](o); 생사여탈권(x)/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o); 삼지사방(x)/산지사방[散之四方](o); 휘양찬란(x)/휘황찬란[輝煌燦爛](o); 난리법석(x)/난리 법석(o); 중구남방(x)/중구난방[衆口難防](o); 기부체납(x)/기부 채납[寄附採納](o); 신출기몰(x)/신출귀몰[神出鬼沒](o)

 

여기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볼까요. 한자어 표기 등은 정확하게 사용했지만, 쓰일 곳이 아닌 데서 쓰이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다음 예문을 보죠.

 

그의 성공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자!
그의 성공적인 약진을 반면교사로 삼자.
카사노바는 희대의 바람둥이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부적절하게 쓰인 경우들입니다.

 

타산지석(他山之石)은 ‘다른 산의 나쁜 돌이라도 자신의 산의 옥돌을 가는 데에 쓸 수 있다는 뜻으로, 본이 되지 않은 남의 말/행동도 자신의 지식/인격을 수양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음’을 뜻하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그러니 타산지석’은 부정적인 사례에 쓰는 말이므로, 위의 문장을 놓고 보면 실패 사례의 경우에는 타산지석이 될 수 있지만, 성공사례는 타산지석과 어울리지 않는 말이 되는 겁니다.

 

‘반면교사(反面敎師)’ 역시 ‘사람/사물 따위의 부정적인 면에서 얻는 깨달음이나 가르침을 주는 대상’을 이릅니다. 즉, 부정적인 면에서 얻는 깨달음/가르침에 쓰이는 말이기 때문에, ‘성공적인 약진’ 등과 같은 긍정적 상황에는 쓸 수 없는 부적절한 말이지요. 반대로, 흔히 쓰는 ‘회자(膾炙. 회와 구운 고기라는 뜻으로, 칭찬을 받으며 사람의 입에 자주 오르내림을 이름)’는 좋은 일, 칭찬받을 일에 쓰이는 긍정적 표현입니다. 부정적 대상에 대해서는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데, 위의 예문에서는 바람둥이라는 부정적 측면에 사용되었으므로 부적절한 쓰임이 되었습니다.

 

그 말의 정확한 의미를 몰랐어요

 

그 밖에도 한자어 중에는 무심코 잘못 쓰기 쉬운 것들이 적잖습니다. 모든 사례를 다루려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 정도랍니다. 여기서는 대표적인 것들을 몇 가지 부류로 나누어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이번 시험은 고난이도 문제들이 많아서 점수들이 낮았어요. 
이번 시험은 난이도 면에서 아주 적절했다.

 

여기서 ‘고난이도’는 ‘고난도(高難度)’의 잘못입니다. 난이도(難易度)는 ‘어려움과 쉬움의 정도’를 뜻하고, 난도(難度)는 ‘어려움의 정도’를 뜻합니다. 따라서 매우 어려운 것은 ‘고난도(高難度)’여야 하며, ‘고난이도’는 논리적 오류를 포함하고 있어서 부적절합니다. 그러나 두 번째 예문은 그 쓰임이 적절하다고 해야겠습니다. ‘난도’의 경우에는 ‘이번 시험의 난도를 매기자면 5단계 중 중간 수준인 3단계쯤 되겠군.’ 등으로 쓸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한자의 뜻은 웬만큼 아는데, 정확히 구분하여 쓰려는 노력이 모자라서 흔히 실수하기 쉬운 말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고난이도(x)/고난도[高難度](o); 부과세(x)/부가세[附加稅](o); 앞존법(x)/압존법[壓尊法](o); 횡경막(x)/횡격막[橫膈膜/橫隔膜](o); 인파선(x)/임파선[淋巴腺](o); 금도[禁度/禁道](x)/금도[襟度](o); 유사어[類似語](x)/유의어[類意語](o); 강강수월래[-水越來](x)/강강술래(o)

 

사용된 한자를 정확히 몰라서 하는 실수

 

한자어인 줄 몰랐거나, 사용된 한자를 정확히 몰라서 실수하게 되는 경우들도 적지 않습니다. 아래에서 몇 가지만 훑어보겠습니다.

 

벼란간 굉음이 들렸다.
한복에 나염 처리된 예쁜 꽃무늬.
그에 관하여 괴상망칙한 소문들이 들려 왔다.
철썩같이 믿었던 그이였는데.

 

예문에 보이는 것들은 흔히 실수하기 쉬운 것들로서, 각각 별안간(瞥眼間), 날염(捺染), 괴상망측(怪常罔測), 철석같이(鐵石-)의 잘못입니다. 특히 날염(捺染)은 해당 업종의 일부 종사자들이나 용어 사전에서조차 ‘나염’으로 잘못 표기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날염’은 피륙에다 무늬가 새겨진 본을 대고 풀을 섞은 물감을 눌러 발라 물을 들입니다. ‘捺染’을 한자사전에서는 ‘무늬찍기’라고 할 정도로 누르는 일이 긴요하며, 그래서 捺(누를 날)을 씁니다. 기억할 때 ‘도장은 눌러 찍으니까 날인(捺印). 눌러서 물들이니까 날염!’으로 해두면 효험이 있습니다.

 

괴상망측(怪常罔測)은 흔히 ‘괴상망칙’으로 잘못 쓰기 쉬운데, 여기에 쓰인 ‘測’은 헤아린다는 뜻이고 ‘罔’은 그걸 할 수 없다(어렵다)를 뜻합니다. 그러니 ‘망측’은 알 수 없다는 뜻이 되지요. 하도 괴상해서요. 괴악망측/괴상망측/괴괴망측 등으로 쓰였는데, 이 표현들이 길어서 앞을 떼어내고 망측만으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흉악망측은 흉측으로 줄었고요.

 

흔히 쓰는 말 중에 이와 같은 경우에 해당되는 것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는데, 그중 ‘벼란간/철썩같이/괴상망칙/괴변/칠흙’ 등은 KBS <우리말 겨루기> 프로그램에서 문제로 나올 정도로 흔히들 실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벼란간(x)/별안간[瞥眼間](o); 어연간(x)/어언간[於焉間](o); 푸악(x)/포악[暴惡-](o); 항차(x)/황차[況且](o); 괄세(x)/괄시[恝視](o); 충진(x)/충전[充塡](o); 철썩같이(x)/철석같이[鐵石-](o); 희안하다(x)/희한하다[稀罕-](o); 괴변(x)/궤변[詭辯](o); ‘흉칙/망칙/괴상망칙’(x)/‘흉측/망측/괴상망측[모두 ~測]’(o); 폐륜아(x)/패륜아[悖倫兒](o); 칠흙(x)/칠흑[漆黑](o); 흑빛(x)/흙빛(o).

 

남들도 쓰기에 따라 써봤어요

 

어느 신문기사의 표현, ‘00씨는 출감하자마자 000 총재의 자택을 찾았다.’를 보겠습니다. 총재의 집이 그의 집으로 바뀔 수도 있는 문제적 표현입니다. ‘자택’이란 ‘자기 집, 내 집’을 한자어로 표기한 것일 뿐이거든요. 남의 집을 높여서 이르려면 ‘댁(宅)’ 정도가 적절합니다. 물론 총재의 사무실이나 다른 곳을 찾아가지 않고 그의 집으로 갔다는 뜻을 표현하기 위해서 ‘자택’이라 적었겠지만, 그럴 경우에도 ‘댁’ 정도면 족합니다.

 

앞서 다뤘던 묘령의 중년 여인도 이처럼 ‘묘령’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남들 따라서 짐작만으로 사용한 경우입니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는 ‘김 군은 장래가 촉망되는 재원이야.’도 있습니다. ‘재원(才媛)’은 ‘재주가 뛰어난 젊은 여자’를 뜻하므로 남자에게는 사용할 수 없는 말이거든요. 몇 가지 사례를 더 살펴보지요.

 

‘까보면 흠결 하나 없는 사람은 없다’에서 ‘흠결’은 ‘흠’이 더 적절한 표현입니다. 흔히 흠결을 ‘단점/결점/잘못/흠’의 뜻으로 쓰지만, ‘흠결’은 흠축[欠縮]과 같은 말로서 구체적으로 양이 축나서 모자라거나 부족할 때 쓰는 말이기 때문에 비유적으로는 가능할 수 있지만, 예문에서와 같이 일반적인 의미로 충분할 경우는 ‘흠’이 더 적절합니다.

 

이와 유사한 사례를 들자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지면 관계로 설명은 생략하고 예시만 하겠습니다.  

 

-‘천방지축마골피’는 희귀성들을 모은 거야 : 희성의 잘못.
-그 아이 병은 희귀 질병이라고나 할까 : 희유병(혹은 드문병)의 잘못.
-우뢰와 같은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 우레의 잘못.
-이번의 비리 사건은 회사 역사상 유래가 없는 일 : 유례의 잘못.
-농민들의 항의 시위로 시내 진입로 일대가 봉쇄되었다. : 일부 지역의 잘못.
태풍으로 남해안 일대에 주의보가 발효되었다 : 맞음.
시행사 측은 북한산 일대 1만 평의 부지를 매입하였다 : (일부) 지역의 잘못.
-놀이시설 이용 시 노약자와 임산부는 유의하세요 : 임신부(혹은 임부)의 잘못.
-서행하면서 2차선으로 달리면 사고 나기 십상이지 : 2차로로의 잘못.
-앞뒤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따따부따 하기는 : 가타부타(혹은 왈가왈부하기는)의 잘못. ←논리적 오류.
-금슬(琴瑟) 좋은 부부는 금실로 엮인다 : 맞음. ‘금실’도 가능함.

 

‘피고’와 ‘피고인’은 같은 말일까? 다른 말일까?   

 

마지막으로, 퀴즈 풀이 하나를 해보죠. 생활 속에서 흔히 대하는 말 중에서요.

 

“피고는 반사회적인 폭력 집단의 수괴로서 ... 등을 저질러 온 바, 일벌백계의 차원에서 엄벌에 처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사형을 구형하는 바입니다.”

 

이것은 아주 유명했던 드라마에서 검사가 재판장에게 구형하는 장면인데요. 이 드라마 작가는 아주 크게 망발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불성실한 작가들의 작품에서 흔히 대할 수 있기도 합니다. 무엇일까요?

 

그것은 ‘피고’라는 말입니다. 짧게 말하자면, 죄인을 다루는 형사 재판에서는 ‘피고인’이라 해야 합니다. ‘피고’는 소송을 당한 쪽을 이르는 일반적인 용어로(소송을 제기하는 쪽은 ‘원고’) 우리나라에서는 민사 재판에서 쓰입니다. 피고인은 형사 피고인의 준말로, 형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형사 피의자 신분인데, 일단 재판정에 나오면 소를 제기한(이것을 ‘기소’란 합니다) 원고 측인 검사에 대향적인 위치에서 피고인이 됩니다. 즉, 원고는 검사가 되고, 피고는 피고인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형사재판에서의 원고와 피고는 소를 제기하는 측과 당하는 쪽을 구분하는 용어이고, 그 신분/직위의 명칭은 아닙니다. 피고 측의 법적 신분 호칭은 ‘피고인’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피고는 민사재판에서 쓰이는 용어이고, 피고인은 형사재판에서 쓰이는 용어라고 알아두시면 됩니다. 그러니, 형사 재판정에서 ‘피고인’을 향해 ‘피고’라는 말을 꺼내드는 작가들이 더 이상 생겨서는 안 되겠죠?   

 


 

 

열공 우리말최종희 저 | 원더박스
『열공 우리말』은 우리말에 대한 130가지 질문과 답을 통해 1천여 표제어의 뜻을 정확히 파악하고 다시 그 표제어와 분류별, 유형별, 실생활 사용례별로 연관된 1만2천여 단어를 쉽게 익힐 수 있도록 설명한 우리말 어휘 공부의 보고이다.

소년이 남자가 되기 위한 필수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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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간 후 수염이 살짝 솜털 같이 나기 시작하고, 샤워를 하고 난 후에 엄마에게 어떻게든 팬티를 벗은 몸을 보여주지 않으려 한다. 슬쩍 보면 성기 근처로 털이 나기 시작하는 것 같다. 아기 같던 목소리의 톤이 점점 낮아지고, 혼자 방문을 닫고 있는 시간이 늘어난다. 이때부터 엄마와 아빠는 조금씩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혹시 야한 동영상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침에 깨워도 일어나지 않던 아이가 갑자기 새벽에 샤워를 하고, 벗은 속옷을 빨래통에 자발적으로 넣는 일이 발생해도, ‘아, 애가 드디어 부지런해졌구나’라는 기쁨과 동시에 ‘몽정이나 자위’에 대한 생각이 부모의 마음에 먼저 떠오르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이때 엄마는 아들에게 무슨 말을 할 지 난감하다. 아빠도 도대체 아이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모르니 어디서부터 접근을 할 지 난처할 때가 많다. 같은 남자라도, 내 아이 문제라면 또 다른 얘기이기 때문이다.

 

당사자인 아이 또한 하루가 다르게 벌어지는 몸의 변화가 뭘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몸과 마음의 변화가 속속들이 일어나는데, 그게 좋기도 하고 낯설어서 어떨 때에는 불쾌한 기분도 들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과거의 아이가 아닌 성인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들어갔는데 이때 무엇을 생각하고, 또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까? 또 부모는 어떤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을까? 혹은 이야기를 하기 남사스럽다고 느낀다면 책 한 권 획 던지면 될 만한 것이 없을까? 그렇다고 너무 가르치려 들지 않았으면 좋겠고, 몸에 좋은 훈계조의 이야기나, “소년이여 꿈을 가져라”는 식의 붕뜬 이야기, “공부나 열심히 해라” 혹은 “인생 뭐 있어! 하고 싶은 거 해!”라는 식의 이야기도 별로다.

 

사실 나도 내 아이가 중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조금씩 마음 준비를 하고 있지만, 파워포인트를 켜놓고 성교육을 포함해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할 생각을 하니 여러모로 장벽을 느끼고 있는 참이었다.

 

이런 궁금증과 부모의 난감함을 쉽고 편하게 해결해 줄 책이 한 권 내 눈에 들어왔다. 제임스 도슨이 쓰고, 스파이크 제럴이 그림을 그린 소년이 된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영국에 살면서 학교를 순회하며 10대에게 따돌림, 성, 음주와 관련한 교육을 하며 관련 연구를 하는 작가다. 평소 아이들과 직접 만날 기회가 많아서 그런지 이야기가 생생하고 구체적이었다. 비록 제목은 ’소년이 된다는 것‘이지만 사실상 내용은 소년이 남자가 되는 과정에 필요한 마음가짐과 태도, 그리고 이성 관계와 성 행위를 할 때 가져야 할 금과옥조를 담고 있다.

 

시작은 성정체성에 대한 방향성을 분명히 정하고 들어간 것이다. 솔직히 나는 이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게이, 레즈비언, 트렌스젠더는 모두 병이나 비정상성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사실 생물학적 성과 성정체성의 차이로 인해 전환치료를 받는 사람들을 괴물로 보지 말고 용기 있는 행동을 하는 것으로 보라는 것, 모두가 동등한 인간으로 보자고 한다.

 

다음, 본격적으로 소년이 남자의 세계에 발을 담그면서 겪는 힘든 일을 소개하기 시작한다. 남자들의 사회에서 서열이 생기고, 그 안에서 나름의 포지션과 역할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동물원’에 비유해서 각각을 동물로 묘사해서 느긋한 사자, 꽥꽥 소리지르는 개코원숭이, 재수없는 족제비, 다수의 개성 없는 양, 존재도 몰랐을 대벌레로 이름을 붙였는데, 그 표현이 절묘하다. 이런 묘사를 바탕으로 나는 지금 누구인지 어떤 역할인지를 생각해보게 한 후, 우두머리인 사자는 절대 놀라지 않는데 반해 개코원숭이는 조금만 놀라도 시끄럽게 굴고 고추를 흔들어대지만 실제로는 불안을 표시할 뿐 이라고 설명한다. 사자는 고추를 흔들면서 호들갑을 떨지 않아도 스스로 안전하다는 것을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데, 그 이유는 사자 자신이 자신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너를 사랑하게 하려면 너 자신을 먼저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청소년을 상담해온 사람으로서 이 책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 자신감과 용기를 내서 남과 다른 나만의 나가 되기 위해 개성을 가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또래 압력 때문에 그저 남들과 똑같아지는 것은 복제 양이 되는 것과 같고, 우~하고 몰려다니는 들쥐가 될 뿐이다.

 

“좋아하는 것을 즐기고, 좋아하는 옷을 입어. 유행을 선도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따라다니는 사람이 되지 마”라고 저자는 조언한다. 실제 이 과정은 쉽지 않다. 그렇지만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할지에 대해서는 잘 설명하고 있고 나 또한 전적으로 동의하는 부분이다.

 

이제 여자를 사귀는 것, 성과 관련한 부분에 대한 실제적인 조언을 한다. 멋있게 보이는 것의 1번은 깨끗한 것, 좋은 냄새, 깔끔한 면도로 완성되는 외모 관리다. 이 책에는 면도하는 법, 옷을 잘 골라 입는 법 (하물며 소년들이 제일 난처해 하는 옷 필수 아이템까지도 소개한다. 면 티셔츠, 데님 소재 바지, 단정한 신발, 가벼운 자켓 등..요 정도 일단 갖춰서 돌려 입으면 최소한 추레해 보이지는 않는다고), 문신과 피어싱에 대한 저자의 조언이 있다.

 

이렇게 매우 구체적이라는 것이 이 책이 마음에 쏙 든 두 번째 이유였다. 10대에 누구나 가질 수 있는 호기심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애정을 가진 어른의 사심 없는 충고가 곁들였다. 사춘기 이후의 2차성징으로 인한 성적인 호기심과 성욕의 증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지나친 죄책감을 갖지 말 것을 알려준다.

 

야한 동영상을 볼 수 있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진짜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은 절대 아니고, 이걸 보는 것이 무슨 천벌 받을 일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명심할 몇 가지가, 성교육 자료도 아니고, 판타지일 뿐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야동과 달리 피자배달부는 피자만 배달하고 그냥 갈 뿐 주인 여자와 무슨 엄청난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포르노와 달리 진짜 섹스를 하게 된다면 콘돔은 꼭 끼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무엇보다 현실에서 남자와 여자가 성관계를 할 때 만일 여자가 “안돼”라고 말하면 그건 멈추라는 말이니 포르노에서처럼 강제로 해서는 그 순간 성폭행이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무엇보다 관계를 한다면 그것에 대해 서로 대화를 하라고 조언을 한다. 이런 현실적인 이야기를 사실 부모는 직접 하기 어렵다. 주제를 피하게 되고, 겁만 주기 일쑤다. 그러니 소년은 본능적인 충동이 올라오면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과 대화를 통해 궁금증을 해소하고, 포르노와 같은 야한 동영상을 보면서 학습을 하며 그것이 진짜라고 믿기 쉽다. 이럴 때 이와 같은 책이 중요한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은 여성의 브래지어를 벗기는 방법, 콘돔을 끼는 방법, 키스를 잘 하는 방법, 성병의 증상과 징후가 무엇인지, 데이트에 대화를 하는 법, 좋은 남자친구의 자세, 데이트 폭력의 위험성 등등 시시콜콜한 디테일까지 포함하고 있다. 비록 영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현재 우리나라 청소년의 현실에 맞춰보면 너무 앞서나가는 얘기들이 대부분이라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부모들이 십대를 바라보고 상상하는 것보다 실제 아이들은 더 많은 것을 궁금해하고, 이미 알고 있고, 혹은 이미 매우 많은 것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 책을 한 번 읽어보라고 할 까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아이는 벌써 멀리 가있을 수 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상한 상상과 친구들끼리 나눈 정보, 인터넷에서 본 신뢰할 수 없는 정보를 사실로 믿기 전에 미리 이런 책을 소개하고 읽어보라고 툭 머리맡에 던져 보는 것은 어떨까?

 

p.s 소녀들은 어떻게 하냐고? 이 출판사에서 『소녀가 된다는 것』이라는 같은 장르의 책이 시리즈로 출간되어 있다.
 

 

 

소년이 된다는 것 제임스 도슨 글/스파이크 제럴 그림/방미정 역 | 봄나무
거뭇거뭇한 수염이 나기 시작한 십 대 소년들의 주체할 수 없는 성과 성관계에 관한 깊은 호기심을 직접적면서도 대담하게 파헤친다. 영국의 성교육 전문 교사이기도 한 저자 제임스 도슨은 오랜 시간 사춘기 아이들을 만나고 이야기해 온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때로는 옆집 형처럼 때로는 단호한 선생님처럼 사춘기 주의 사항들을 알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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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골이 없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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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아침 출근이다. 다섯 시 반에 일어나 여섯 시 전후 집을 나선다. 마을버스를 타러 가는 데 걸리는 시간 7분, 집 앞 공원을 지나다 보면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로 각인된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이 흐른다. 평소 같으면 텅 비었을 공원이 웬일로 남녀노소 불문 사람이 많다. 아, 그러고 보니 장미 대선 본날이다. 공원 끝에 있는 투표장을 새벽같이 찾는 인파다.

 

대선의 여파는 카페에도 미쳤다. 평소 같으면 일곱 시 반, 가게 문을 열자마자, 혹은 내가 여는 것과 동시에 들어오는 나보다 오래된 단골들이 있다. 오늘은 그 손님들이 오지 않는다. 조용한 카페에서 클래식을 듣기로 한다. 요즘『아다지오 소스테누토』를 읽고 나니 새삼 클래식이 좋아졌다. 더불어 클래식에 입문한 계기를 떠올렸다.

 

중학생 시절부터 아버지의 만화 콘티를 컴퓨터로 입력하며 얼결에 글 쓰는 법을 익혔다. 그 재주를 살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글쓰기 아르바이트를 했다. 공익백서 제작부터 시작해 잡지 자유기고에 홈페이지 제작, 게임 시나리오며 영화 시나리오까지 일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다 2002년 운 좋게 한 방송국에서 크리스마스 특집극을 방영했다. 영상물이 돈이 된다는 걸 깨닫고는 진지하게 그쪽으로 빠져들었다. 전통 있는 빵집 이야기를 적고 싶다는 일념으로 집 근처 태극당에 취직했다.

 

2003년의 일이다. 그 때도 지금처럼 매일 아침 여덟 시까지 출근했다. 카스테라 박스를 백 개씩 접어 창고에 탑처럼 쌓았다. 단골은 대부분 노인이었다. 카페를 겸한 홀에서는 인스턴트커피며 우유, 쌍화차를 팔았다. 옛날 다방에서나 볼 법한 공중전화가 있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최초의 태극당 때부터 일했다는 공장장 할아버지를 만났다. 반 지하층에 있는 모나카 아이스크림 공장의 은밀한 제조법을 들었다. 대를 이은 사장님은 클래식을 좋아했다. 매일 듣다 보니 하이든과 모차르트정도는 구별할 수 있게 됐다. 사장님이 따로 용돈을 챙겨주시거나, 유명한 족발집에서 족발을 사주시기도, 안경도 맞춰주시는 일도 있었다. 직원뿐만 아니라 근처 보석점 겸 안경점 매출을 염려하셔서 아르바이트가 들어오면 금으로 된 액세서리나 안경 같은 것을 꼬박꼬박 구입하셨다.
 
최근 태극당에 들렀다가 격세지감을 느꼈다. 클래식 대신 가요가 나왔다. 빵 종류도 많이 바뀌고 가격은 올랐다. 카페에는 에스프레소 머신도 생겼다. 스타벅스 같은 분위기에 영 적응을 못했다. 모나카 아이스크림을 우물거리며 걱정했다. 사장님은 잘 지내실까. 이젠 매장에 안 나오신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 때 계시던 빵공장 어르신들이며 직원 분들은 어떻게 지내실까. 예전, 이곳을 메웠던 단골 노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오전 여덟 시가 넘도록 마수걸이를 못했다. 『당신과 하루키와 음악』클래식 CD를 튼다. 소설 『댄스 댄스 댄스』에 언급되었던 '어느 황홀한 저녁‘이 흘러나온다. 옆집 사장님이 “투표는 했어” 물으며 천원짜리 두 장을 들고 들어오신다. 손님이 너무 안 오자 염려하신 모양이다. “부재자 투표요. 미리 했죠.” 대꾸하며 철제 드리퍼를 왼손에 든다. 글라인더에 꽂고 원두를 간다. 서서히 떨어지는 가루의 리듬감은 십오 년 전 처음 에스프레소를 뽑았을 때 그대로다. 템퍼로 적당히 다독여 머신에 꽂고 에스프레소를 추출하는 사이, 비가 온다.
 
테라스에 내놓은 철제 테이블과 의자를 들여놓을까 고민하다 그냥 두기로 한다. 혼란한 정국처럼 미세먼지가 심했던 흔적을 빗물에 씻겨본다. 단골들은 국민의 의무를 다하려 바쁜 것일 테니 문학수 기자와 무라카미 하루키가 각자의 책에서 소개했던 클래식을 차례로 복습해보기로 한다. 21세기 속 20세기 카페의 나날들처럼 평안한 내일이 찾아오길 빌며.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서현 “무언가를 속시원하게 푸는 방식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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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 작가를 만났습니다. 『눈물바다』(2009), 『커졌다!』(2012) 이후 5년 만에 나온 창작그림책 『간질간질』을 가지고요. 공백만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서현 작가는 어린이들의 마음을 포착하여, 공감하고 치유하는 그림책들로 많은 사랑을 받아 왔습니다. 어린이들 눈높이에 딱 맞는 이야기로 감정과 욕망을 시원하게 드러내며 카타르시스를 얻는 장점은 최대한 살리면서 더욱더 유쾌한 모습으로 진화했습니다. 머리카락 한 올로 출발한 상상력이 감각적인 캐릭터, 들썩거리는 몸짓과 소리, 군무 연출로 이어지며 단박에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서현 작가는 1982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했고, 한국일러스트레이션학교(Hills)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했습니다. 어릴적부터 만화를 좋아해서 만화적 상상이 담긴 다양한 표현을 시도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들이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유머러스한 그림책을 만들고 싶어 합니다.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작업을 멈추진 않고 계속 하고 있었어요. 일러스트레이션 일 하면서 개인 작업들을 하고요. 제가 워낙 장난감이나 피규어를 좋아해서, 피규어 수업을 듣고 그거 만드느라고 시간을 보냈어요. 사실은 일 받아놓은 게 많아서 둘을 병행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어요. 피규어 작업이 시간 투자를 많이 해야 되거든요. 그래도 일단은 지금 하고 싶은 일을 미루고 싶지 않아서 도전을 했어요. 만화 작업도 구상하면서 지냈고요. 저는 즐거운 시간이었는데 책이 조금 늦게 나오게 됐어요.

 

작업실이 원래 수원이었잖아요. 서울로 이사를 했네요.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요. 수원 작업실을 한 6년 정도 썼더라고요. 편안하고 정도 많이 들었는데 어느 날부턴가 그 공간에 익숙해지다 보니까 일이 잘 안 되는 거예요. 변화를 갖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마침 피규어 선생님이 작업실을 같이 쓰자고 말을 해 주셔서 서울로 이사를 오게 되었어요. 덕분이 일이 되게 잘돼요.

 

수원에서 작업실까지 상당히 먼데 규칙적으로 나와요?


전에는 집에서 워낙 가깝다 보니까 시간을 짜임새 있게 쓴다는 느낌이 아니었어요. 짬 나면 가서 일을 하고, 거의 집 안에서 방을 옮겨 다니는 느낌처럼 다녔거든요. 여긴 약간 출퇴근 같고 해서, 그동안 방만했던 생활이 정리되는 것 같아요(웃음).

 

『커졌다!』이후 창작그림책은 5년 만이죠.


사실은 많이 긴장이 되요. 저는 저답게 작업했다고 생각하는데 읽어주시는 분들이 어떻게 봐 주실지, 재미있게 느껴주실지 걱정도 되고 설레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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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질간질』은 분위기와 리듬이 만화 같아요.


제가 이야기를 푸는 방식은 그림책이지만, 어릴 때부터 만화를 되게 좋아했어요. 좋아하고 많이 보다 보니까 만화적 언어나 형식에 익숙했거든요. 그림책을 만들 때 그게 녹아들어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만화적인 느낌이 제 그림책에서 나오는 게 저는 어색하지 않아요.

 

스타일이 더 굳어졌달까, 깊어졌달까. 더 ‘서현’다운 게 나왔구나, 하고 봤어요.


와 정말요? 그렇다면 이 책의 반응을 떠나서 저한테는 되게 의미 있는 이야기인 것 같아요.

 

서현 작가 그림책의 매력은 무엇보다 카타르시스라고 생각해요. 『간질간질』에서 극대화된 느낌이 있어요. 본인 생각은 어때요?


제가 예전에 『눈물바다』를 만들었을 때 후기를 썼는데, ‘내가 나한테 해주는 위로이자 유쾌한 농담’이라고 표현을 했거든요. 평소에 마음껏 발산하고 이런 성격은 아닌데 작품을 할 때 그렇게 되는 거 같아요. 저도 모르게 그런 이야기가 자꾸 만들어져요. 제 안에 쌓인 게 많은가 봐요(웃음). 계속 할 수 있을까요? 고민이에요.

 

그림책을요?


아뇨. 이런 식의 이야기를요. 계속 무언가를 속시원하게 푸는 방식의 이야기요. 희한하게… 제가 카타르시스를 의도하진 않았거든요. 그런데 계속 그렇게 되는 거예요. 저 진짜 쌓인 게 많은 거 같아요. 아 어떡하지. 뭔가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걸까요? 저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거 보시는 분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시면 어떡하죠?

 

음… 아니요. 아직 더 분출시킬 수 있을 것 같아요. 『간질간질』보다 더요.


정말요? 저에겐 아직 에너지가…!!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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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은 캐릭터 얼굴이 견과류를 닮았었잖아요. 이번에는 그냥 사람이에요.


원래 캐릭터 만드는 데 신경을 많이 쓰긴 하거든요. 그런데 그런 부담에서 약간 빠져 나온 것 같아요. 그전에는 일반적인 사람의 형태보다는 밤이나 도토리, 이렇게 특징을 부여해서 재미를 줘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간질간질』에서도 그렇긴 했지만… 그래도 주인공이 짓는 표정이나 춤추는 몸짓. 나아가는 모습에 집중해서 그림을 그리다 보니까 캐릭터의 형태가 그렇게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간질간질』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지 궁금해요.


‘이렇게 하면 웃기겠는데?’ 항상 이게 시작이에요. 처음에는 시조같이 만들고 싶었어요. (3.4조 가사체로 낭독하며) 머리가~ 간지러워~ 머리를~ 긁었더니~ 이런 식으로, 약간 운율이 맞는 느낌이요. 어느 날 머리카락이 떨어져서 ‘나’ 들이 되고, 1단계로 엄마를 격파하고, 2단계는 아빠, 3단계는 누나를 해치운 다음… 이런 단순한 생각이었어요. 시조 느낌을 끝까지 유지하고 싶었지만, 이야기를 만들면서 좀 줄어들긴 했어요. 그래도 여전히 운율이 남아 있다고 생각은 해요.

 

마지막에 거의 일수 찍듯이 마감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완성되면 한 장 넘기고, 한 장 넘기고…


그전에 다른 일들도 하다 보니까 작업이 좀 더뎌졌어요. 뭐라고 설명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오랜만이라 더 고민도 많고 그래서 그랬나. 여러 가지 이유로 책이 늦게 나왔네요.

 

작업이 잘 안 풀린다, 그런 느낌에 가까운 걸까요?


음… 생각보다 엄청 안 풀리거나 그런 건 아니었는데…

 

그럼 게으름을 피운 거 아니에요?


아아, 저의 게으름의 소치였던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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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책 『눈물바다』가 굉장히 사랑을 많이 받았어요. 지금까지도 그렇고요. 거기에서 오는 부담은 없었을까요? 


부담이 없지는 않았어요. 있긴 있었는데 그걸 느낄 새도 없이 다음 책, 또 재밌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런 게 더 컸어요. 재밌게 읽어 주시네. 신난다! 이렇게요. 이야기를 만드는 작업 자체가 되게 즐거웠어요. 저는 작업할 때 제가 재미있는 걸 하자가 일순위예요. 작가가 신나게 작업을 하면 책을 읽는 분들도 공감하시지 않을까 하거든요. 그런데 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깊은 의미를 찾아주시는 것 같아요. 포인트를 짚어 주시기도 하고. 독자를 만나고 평론가 분들의 글을 읽고, 저 또한 작품의 의미를 되새기거든요. 그럼으로써 완성되는 느낌이에요.

 

『간질간질』을 본 어른 독자들 반응은 좀 갈리는 편이에요. 그런데 아이들은 엄청나게 좋아하더라고요.


저는 아이들이 되게 재미있는 생명체라고 생각해서 좋아해요. 그런데 아직은 가까이 못 가고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느낌이에요(웃음). 쉽게 다가가지는 못하거든요. 작가와의 만남 할 때도 어색하게 말 걸고 그래요. 그래서 사실 잘 모르겠어요. 아이들의 마음을. 저는 그냥 제가 생각하는 걸 표현하는데 읽어주시는 분들이 아이의 마음을 잘 표현했다고 해석해 주시니까. 그렇다면 아직 내가 철이 덜 든 것인가 생각하고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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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 작업 스타일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 있어요?


네. 사실 저는 기본적으로 단순하게 작업하는 편이거든요. 유쾌하고 가볍게.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유쾌함을 잃지 않으려는…(웃음). 제가 그걸 잃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한다기 보다는 저도 모르게 습관처럼 그런 분위기로 그림을 그리게 되요. 그냥 유쾌함으로 이야기하는 방식이 자연스러워요.

 

이야기는 즐거우면 된다고 생각을 하는 거죠.


네.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그 안에서 뭔가를 찾아낼 수 있다면 더 좋겠죠. 노래를 들으면 아 그냥 즐겁다, 좋다. 이런 것처럼 책도 부담 없이 이야기 자체로 즐겨주셨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전에 요괴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었는데 지금은 어때요?


지금도 여전히 관심이 있는데요. 피규어로 만들고 있는 먼지 캐릭터도 어떻게 보면 요괴 같이 느껴지는 거죠.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괴생물체잖아요. 우리가 상상하는 요괴보다는 가볍고 귀여운 형태이긴 하지만. 그런 식으로 이상한 생명체들을 이야기의 대상으로 삼고 싶은 마음이 많이 있어요.

 

예전 작업실에는 직접 만든 인형이랑, 장난감들이 진짜 많았잖아요. 요즘 취미로 즐기는 거 있어요?


사실 옛날엔 그림 그리는 게 취미였어요. 취미이자 가장 좋아하는 일이었는데요. 그림 그리는 게 일이 되고 나서는 뭘 만들거나 하는 것들… 일로 하는 그림 외에 다른 작업 방식이 다 취미가 되었어요. 타피스트리나 피규어, 오토마타 같은 것들이요. 짬나는 대로 재미있게 하고 있거든요. 그런 게 취미라면 취미예요. 나중에 어디에 쓰일지 모르겠지만 만드는 것 자체가 즐겁더라고요.

 

지금은 피규어에 가장 빠져 있는 거죠?


네. 피규어를 만들고 그 캐릭터로 이야기를 만드는 작업들이요. 작년에는 완전히 몰입했었어요. 그림은 평면에 머물러 있잖아요. 그런데 피규어는 사람과 똑같이 삼차원의 공간에 자기의 존재감을 가지고 있으니까 훨씬 더 함께하는 느낌이 들어요. 호흡하고 살아 있는 것처럼요. 더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 같아요. 존재감이 막 느껴져요.

 

더 생생하게 다가오는군요.


뭔가 재미있는 형태를 만들어서 딱 놓으면, 그 아이를 가지고 또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고, 그림을 그리고 싶고, 절 자극하는 거 같아요. 그런 매력. 만드는 자체도 너무 재미있고. 만들어서 놓는 것도 재미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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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 놓고 사진을 찍거나 그러진 않나 봐요.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이요.


네. 사진으로 찍어두지 않아도 존재가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일단은 만드는 자체의 즐거움에 빠져 있어서 그 다음은 아직 생각을 안 했어요. (웃음)그 다음은 귀찮아하는 것도 있어요.

 

5년 뒤에도 지금처럼 활동하고 있을까요?


앗 되게 무서운 말이네요. 그러게요. 5년 뒤에 저는 좀 더 하고 싶은 작업을 마음껏 하고 있지 않을까요? 사실 제가 작업을 할 때는 마음껏 하는데, 막상 책이 나오면 걱정이 많아져요. 자신감이 살짝 떨어진달까. 경험이 쌓이면 더 자유롭게 시도하고 다른 방향으로도 이야기를 만들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실 저는 그림책의 가능성이나 범위를 되게 넓게 보고 있거든요. 5년 후에도 그렇게… 입체로도 하고, 만화로도 하고. 제가 흥미를 가지고 있는 방식으로 작업하고 있을 것 같아요. 결국은 그림책이다, 라고 생각해요. 아 그런데 제가 두서없이 너무 말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아니예요. 정리하다 보면 늘 모자라요(웃음)


음… 이건 인터뷰에 적합한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는데요. 독자가 있어야 작가가 존재하지만, 첫째는 작가가 표현하고 싶은 걸 위해서 하는 거잖아요. 그런 것들이 편집 과정을 통해서 다듬어지고, 단장을 마치는 거죠. 민낯으로 독자들을 만나는 게 아니라 화장도 하고 옷도 입고. ‘너무 날 낯설어 하지마~  나 쫌 준비하고 가는 거야.’ 이렇게요. 사실은 책이 그렇잖아요. 팔려야 하고, 그게 원동력이 되고, 현실적으로 작가가 다음 작품을 할 수 있는 경제적인 힘이 되고. 그렇다 보니까.

 

팔릴 만한 이야기요?


네. 사실은 저도 그런 걸 생각해 봤는데 잘 모르겠어요. 욕심을 갖지 않은 건 아닌데, 결국엔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제가 뭔가 상을 받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지금도 재미있어 해 주시는 분들이 계시니까. 힘입어서 내가 재미있게 생각하는 것들을 하자!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다행히 읽어 주시는 분들이 계시니까 그렇죠. 아니면 자신감이 진짜 엄청 떨어질 것 같아요. 

 

저는 꽃을 배우고 있거든요. 꽃을 한다는 건 아름다움을 만드는 건데, 거기서 자꾸 의미를 찾게 되요. 아름다워서 뭐? 라고. 그런데 서현 작가는 이야기의 의미를 재미 그 자체에 두는 것 같아서 인상적이에요.


전 예쁘다 귀엽다 재미있다, 그걸 느끼는 것 자체로 감동이라고 생각해요. 감동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게 마음이 움직이는 거잖아요. 말 그대로요. 나를 환기시키고 내 마음을 움직이게 하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야기는 그 자체로 존재의 의미인 거죠. 그게 누군가한테 오래, 깊게 남을 수 있으면 너무 좋은 거고요. 빨리 사라져 버리면 허무하긴 하겠죠. 하지만 감동이 지속되면 창작자로서 더더욱 기쁠 것 같아요. 그런 분들은 책을 사 주시고 계속 갖고 있어 주시겠죠? 그 시절에 잠깐 보고 흘러 가는 게 아니라…


 

 

간질간질서현 저 | 사계절
『간질간질』은 『눈물바다』와 『커졌다!』를 쓴 서현 작가의 세 번째 그림책입니다. 작가는 어린이들의 마음을 포착하여, 공감하고 치유하는 그림책들로 많은 사랑을 받아 왔습니다. 어린이들 눈높이에 딱 맞는 이야기로 감정과 욕망을 시원하게 드러내며 카타르시스를 얻는 장점은 최대한 살리면서 더욱더 유쾌한 모습으로 진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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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의 가면 속 민낯을 마주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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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닝

 

파도는 바다를 끌고 자꾸만 어디로 가려고 하는 걸까요.
겨우 흰 포말로 사라져 버리려고
아득히 멀리서 그렇게 가득히 달려오는 걸까요.
고작 모래에 스며들려고 말이지요.

 

봄비는 대지의 몸속으로 스며들어가
풀빛으로 다시 스며나옵니다.
햇빛은 꽃잎 속으로 스미고, 바람은 어린 새의 깃털 속으로 스미고
연두는 분홍 속으로 스며들어갑니다. 
대기에도 봄빛이 스며,
보드라운 살결처럼, 부드러운 표정처럼 온화한 느낌이죠.

 

이제 곧 라일락 향기가 골목골목 스며들겠지요.
봄에는 통정하듯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듭니다
그리고 사월의 일곱 시,
이제 저녁의 푸른빛이 암청색 어둠 속으로 스며듭니다.

 

‘스밈’이란 건 마음의 일이기도 해서
가슴에 고독이 스미고, 슬픔이 뼛속 깊이 스며든다고도 하죠. 
그리고 당신의 말 한 마디가, 누군가의 미소 한 모금이
마음 속으로 깊고 오래 스미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사람이 사람에게 스미는 일.
그러니까 관계의 삼투만큼 귀하고 즐거운 스밈은 또 없겠지요. 
안녕하세요, 여기는 이동진의 빨간책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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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의 가면, 날이 가면 갈수록 늘어나는 그 가면에 당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가면 속 민낯을 마주하는 일이겠죠.


이창무, 박미랑 두 범죄학자가 말하는 범죄의 가면 앞에서 당당히 맞설 수 있는 방법. '책, 임자를 만나다' 이번 시간에서는 『왜 그들은 우리를 파괴하는가』를 통해서 범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왜 그들은 우리를 파괴하는가』
최고의 범죄학자가 들려주는 진화하는 범죄의 진실

 

1) 책 소개
이창무 교수는 한국이 <범죄사회>가 되어가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시대 변화와 함께 진화하여 새롭게 등장하는 범죄를 분석하고 대응책을 제시한다. 특히 SNS에서 기승을 부리는 사이버 범죄와 보이스피싱, 스미싱, 몸캠 피싱 등 각종 금융범죄를 모를 경우 커다란 정신적, 물적 피해를 입게 된다고 경고한다. 책에 담긴 보안전문가의 범죄 데이터와 실제 사례를 알면 피해를 방지하고 쉽게 대처할 수 있다.

 

데이트 폭력 논문을 발표하는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범죄 연구의 권위자 박미랑 교수는 한국 여성들이 데이트 폭력, 가정폭력을 당하고도 모르거나 부정하여 더 큰 피해를 입고 있다고 경고한다. 특히 데이트폭력은 ‘미리 찾아온 가정폭력’으로서 방치할 경우 우울증, 살인, 자살로 이어지기 때문에 연인의 데이트 폭력이 조금이라도 의심이 든다면 책 속 부록 ‘데이트폭력 진단표’를 반드시 체크해보기를 권한다.

 

모든 범죄는 범죄동기와 범죄기회가 만나 발생한다. 그렇기에 반대로 두 조건 중 어느 하나라도 차단하면 범죄로부터 안전할 수 있다고 말하며, 각종 범죄 사례를 분석하여 자신을 지키는 법을 알려준다. 또한 범죄가 확산되어 범죄 피해자가 되기까지는 범죄에 대한 공포가 큰 원인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며, 무지를 타파하고 공포를 이겨낼 방법을 전달한다. 범죄와 타협하지 말고, 피해를 부정하지 말고, 정보를 공유하라는 것이다.

 

범죄를 이해하고 예방하기 위해서는 범죄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범죄자들의 두려움을 이용할 필요가 있다. 각자 개인화된 두려움은 우리 사회의 두려움이라는 그늘이 되기도 하지만, 우리의 두려움을 집단화의 과정을 거쳐 당당한 용기로 승화한다면 범죄가 갖는 영역을 포위하고, 줄일 수 있다.


2) 저자 : 이창무
뉴욕시립대학교 형사사법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한국을 대표하는 범죄ㆍ보안 전문가다. 왕성한 국제학술활동과 범죄학 연구의 공로를 인정받아 케임브리지국제인명센터(INTERNATIONAL BIOGRAPHICAL CENTER, IBC), 마르퀴즈 후즈 후(MARQUIS WHO’S WHO) 세계인명사전, 미국 인명연구소(AMERICAN BIOGRAPHICAL INSTITUTE, ABI)에 등재되어 세계 3대 인명사전에 모두 이름을 올렸다. IBC가 주관하는 ‘세계 탁월한 과학자 2000명’에 선정되기도 했다.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시립대학교에서 형사사법학(CRIMINAL JUSTICE) 석ㆍ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에서 학위를 취득하기 이전에 중앙일보 기자로서 국회, 보험감독원, 경찰청 등을 출입하며 총선 대선 취재와 각종 사건 사고 취재를 담당했고, 한국기자협회가 주관하는 ‘이달의 기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아시아경찰학회 회장과 한국경찰연구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한국산업보안연구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현재 중앙대학교 산업보안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패러독스 범죄학』, 『10년 후 세상』(공저), 크라임 이펙트』등이 있다.

 

저자 : 박미랑
한국에 생소했던 ‘데이트폭력’에 관한 범죄학 논문을 국내 최초로 발표하였고 청소년ㆍ여성범죄자와 피해자, 그리고 사회의 약자를 바라보는 형사사법기관과 사회구조를 범죄학적 관점으로 연구하고 있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언론학과 사회학을 공부하고 미시건주립대학교에서 형사사법학(Criminal Justice)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사회학습이론에서 세계적 석학인 로널드 에이커스(Ronald Akers)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플로리다 대학교 범죄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범죄학과 법학의 연결점을 찾아 고려대학교에서 법학과 형법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서 부연구위원을 지내고 유엔(UN) 범죄예방과 형사사법위원 총회 한국대표단으로 참가했다. 한국공안행정학회 편집이사를 비롯하여 대한범죄학회, 한국범죄심리학회, 그리고 한국셉테드학회 이사를 맡고 있다. 현재 한남대학교 경찰학과 및 범죄학과(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 219-220회 <책, 임자를 만나다> 도서

 

『당신 인생의 이야기』

 

단 한 권의 작품집으로 위대한 SF소설 작가가 된 테드 창.
정교한 기교와 미묘한 감정이 결합된 문장.
그 문장으로 빚어낸 SF안에서의 삶.
테드 창의 작품에는 바로 그러한 우리 각자의 인생이 담겨 있습니다.

 

'책, 임자를 만나다' 이번 시간에서 이야기 나눌 책은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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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꼭 해야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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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라는 두려움과 함께라는 유혹 사이에서 서성이는 이들에게
 

옷깃을 여미며 언제 봄이 오냐고 투덜대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거리엔 온통 벚꽃이 흩날립니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 듯 여기저기서 결혼 소식이 들려오죠. 뒤이어 날아오는 한마디, “너도, 결혼해야지-”

 

어려선 결혼하는 게 당연한 줄 알았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다 가정을 꾸리는 삶, 여기에 의문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냥 그렇게, 모두들 살아가는 줄 알았으니까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다른 이들의 삶을 엿보면서, 문득 의문이 생겨났습니다. 결혼, 꼭 해야 하는 걸까요?
 
자기 생각의 변화와는 상관없이 우리는 다른 이들의 시선을 늘 신경 쓸 수밖에 없습니다. 정상의 범주에 든 삶을 살아야 할 듯한 기분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끊임없이 말하거든요. “결혼, 왜 안 해?” 이 모든 시절을 지나온 이윤용 작가가 이에 대한 답을 준비했습니다. 남들은 다 괜찮아 보이던 시절을 지나 이젠 이것도 괜찮지의 시절을 보내고 있는 작가가 우리에게 전하는 한마디, 『저는 괜찮습니다만,』 .


안녕하세요, 이 책을 만든 편집자 배윤영이라고 합니다.

 

책의 쓸모 중 하나는 나보다 앞서 살아간 이들의 삶에서 힌트를 얻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면에서 『저는 괜찮습니다만,』은 참 충실한 책입니다. 작가 자신과 주변인의 연애, 만남, 이별 같은 내밀한 이야기에서부터 자전거, 노트북 배터리, 우산, 방충망처럼 일상에서 건져 올린 소소한 이야깃거리를 통해 풀어내는 삶의 이야기들이 우리의 매일매일에 사무치게 와 닿기 때문입니다. 읽다 보면 피식 웃다가 찔끔 눈물이 나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무릎을 탁 치며 공감하게 하죠. 헤매고 넘어지는 길에서 조금은 덜 다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물론이구요.

 

결혼하건 안 하건 중요한 건 자신의 삶을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건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또 혼자 행복하지 못하면 함께여도 행복하지 못한 법이니까요. 작가는 어떤 결론도 내리지 않습니다. 다만, 삶이라는 길에서 하루하루 부대끼면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면, 그걸로 된 거라고 어깨를 토닥일 뿐이죠.

 

마지막은 이윤용 작가의 서문으로 대신하려 합니다. “결코 녹록지 않은 타인의 시선 속에, 저는 이제 답을 준비합니다. 저는 괜찮습니다만, 이 대답은 결코 괜찮지 않은 세상에 대한 오기이기도 하며 스스로에 대한 주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이 책을 읽는 당신에게도 작은 주문이 될 수 있기를. 당신도 괜찮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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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블루락 골프장에서 놀던 두 연인을 쏘았다. 작년 12월 허먼로드에서 있었던 일도 내가 한 것이다. 너희는 나를 잡을 수 없다."


1969년 7월 5일. 신원을 밝히지 않은 한 남자가 샌프란시스코 경찰에 전화를 걸어서 남긴 말이다 경찰은 즉시 현장으로 출동했고 괴한의 말처럼 총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 마이클과 페린이라는 이름의 두 연인을 발견해서 서둘러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페린은 결국 사망했다.


작년 12월 허먼로드에서 있었던 일은 1968년 12월 20일. 베니샤 시 외곽의 허먼로드 호수에서 데이트를 즐기던 페러데이와 베티가 살해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죽은 두 연인의 나이는 고작 17살, 16살이었다. 당시 경찰은 둘의 시신을 확인하고 곧 조사에 들어갔으나 별다른 단서를 찾지 못했는데 6개월 후 다시 살인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얼마 뒤인 1969년 8월 1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유력 신문사에 한 통의 편지가 배달 되었다. 내용인즉슨 두 살인 사건이 모두 자신의 소행이라는 주장과 사건에 관한 상세한 설명 이었다. 아울러 범인은 4개의 암호문을 동봉하면서 이를 신문에 개재하지 않으면 살인을 계속 하겠다고 협박했다. 편지에는 또 동그라미와 십자가를 겹쳐놓은 사격 표적과 같은 것이 그려져 있었는데 이는 나중에 조디악 표시 라고 불리었고 편지를 보내온 범인은 조디악 킬러라고 불렸다. 추후에 편지들이 매번 "조디악 가라사대"라는 문구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 『왜 그들은 우리를 파괴하는가』 (메디치미디어)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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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문학사의 두 거장이 마주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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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테, 바이마르에 오다
토마스 만 저/임홍배 역 | 창비

독일 문학의 가장 위대하다고 평가받는 두 작가가 소설을 통해 하나가 된 작품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로테, 바이마르에 오다』 이 작품이죠. 토마스 만 말년의 대표작인 이 작품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후속 이야기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을 토마스 만이 썼다는 것도 흥미로운 점 중에 하나겠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속의 여주인공 로테. 그 로테의 실제 모델인 인물이 있었는데 그녀가 60대가 되어 괴테와 44년만에 재회를 하는 실화가 있었다고 합니다. 바로 그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소설의 주인공이 괴테가 아닌 로테라는 점입니다. 모두 9개의 챕터로 구성된 이 소설에서 괴테가 등장하는 것은 7번째 챕터가 되어서야 등장한다고 하죠. 전기 작가인 슈테판 츠바이크는 이 작품에 대해 "수년간 기다려온 완벽한 가장 완벽한 작품이다. 이 소설을 통해서 문학적 전기는 최초로 완벽한 예술 형식에 도달했다. 여기서 그려진 괴테의 초상은 후대에 유일무이한 본보기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570여페이지의 묵직한 분량에서 괴테, 그리고 토마스 만이라는 독일 문학사의 두 거장이 어떻게 마주하는지 읽기 전부터 관심을 자아내게 하는 작품으로 보입니다.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
김혜리 저 | 어크로스

영화 평론가 김혜리 씨의 저서 입니다. 이 책에 담긴 글은 김혜리 씨가 <씨네21>에 연재하고 있는 인기 칼럼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에 연재된 글입니다. <와일드>부터 <노 홈 무비>까지 40편의 작품을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개인적으로 김혜리 씨의 글을 지난 20년간 읽고 있는 독자로서 그의 책이 나올때마다 설레는 마음으로 펼쳐보게 됩니다. 단지 영화 평론의 좁은 우물 뿐만이 아니라 김혜리씨의 글은 문장 자체로도 훌륭해서 한국어가 얼마나 사려깊고 섬세한 언어인지 새삼 깨닫게 해주는데요, 그래서인지 오랫동안 그의 글을 읽었음에도 항상 기대가 되고 읽고 싶어지는 마음이 듭니다. 김혜리 씨는 이 책의 서문에서 "인간은 각기 상대적 시간을 살아가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의 시간은 무심히 일치한다."고 말하고 있는데요, 이 서문만으로도 앞으로 펼쳐질 영화의 일기가 궁금해집니다.

 

 

이달의 Book Trailer

『그래도 괜찮은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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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조용하다고 생각한 소녀가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원래 그런 세상이라고 생각한 소녀는 나중에야 자신만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 싶었던 소녀는 자신 대신 소리를 들어줄 귀가 큰 토끼 ‘베니’를 그리기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자신이 만들어낸 토끼 ‘베니’와 함께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한 소녀에 대한 희망과 그림에 대한 것이다.

 

그녀가 잘할 수 있는 일은 그림을 그리는 일뿐이었다. 조금씩 자신의 그림을 알리고 유명해지기도 한 그녀는 자신 대신 많은 일을 해주는 토끼 ‘베니’에게 감사해하며 유쾌하게 살아간다. 그렇지만 몇 년 전, 그녀는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유전적 병인 이 병은 점점 시야가 좁아지는 병으로 결국에는 아예 보이지 않게 되며 아직까지 치료법도 없다고 한다. 세상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조금씩 맺어가던 그녀는 이제 자신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점점 사라지게 된다는 것에 슬퍼하지만 그 안에서 다시 희망을 찾는다.

 

언제나 유쾌하고 웃음을 잃지 않는 그녀는 매일매일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서 행복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림을 그릴 수 있을 때까지 최대한 많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한다. 빛이 완전히 사라져도 그녀는 계속 그림을 그릴 것이다. 보이지 않아도 마음으로 그녀는 그림을 그려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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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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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넘게 책을 만들어 왔지만, 나는 책이 삶을 변화시킨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혹은 그러므로 책이 일으킬 수 있는 가장 큰 사건은 읽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지극히 ‘사적인 출간기’를 요청 받은 만큼 『사람의 부엌』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나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풀어가 보려 한다.

 

나는 워킹맘이다. 일, 육아, 살림에 지쳐 외식이 잦은 편이었고, 냉동식품들을 냉장고 가득 채워 놓아야 안심이 되었다. 부엌, 그리고 부엌의 가장 강력한 상징인 냉장고를 새롭게 사유하는 책을 만들면서도 냉장고와 거리를 두는 실천은 별난 사람들이나 가능한 일이라고 여겼다.

 

좋은 책은 저자의 문장이 아니라 나의 삶으로 남는 것이라 생각한다. 저자가 세계 각지 부엌들을 찾아다니느라 원고를 받고 책을 내기까지의 기간이 오래 걸렸던 덕인지, 이 책은 가랑비에 옷 젖듯 시나브로 내 삶을 바꿔 놓았다. 수도 없이 저자와 의견을 나누고 원고를 매만지는 사이, 아무런 의문을 품지 않았던 부엌 습관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대형마트에서 신나게 장 봐 온 음식들을 냉장고에 집어넣다가 멈칫했고, 당근을 채소 칸에 넣다가 “아, 얘는 세워 보관하랬는데.” 하며 슬며시 다시 꺼내 눈에 잘 보이는 곳에 올려두기도 했다. 감자와 사과는 빛이 차단되면서도 통풍이 잘 되는 뚜껑 달린 바구니에 함께 넣어 보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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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고 작은 주택으로 삶터를 옮기게 되었다. 집 주인이 마당에 심어놓은 과실수들에 열매가 달리고 하나 둘 땅에 떨어지기 시작하자 어쩔 수 없이 초여름엔 보리수로 청을 담갔고, 늦가을엔 모과를 따다가 차를 만들었다. 이웃에게 얻은 돼지감자는(그때까지 돼지감자가 어떻게 생긴 줄도 몰랐다.) 마른 프라이팬에 덖어 말렸다. 처음엔 일거리가 늘어난다며 툴툴댔는데 슬슬 재미가 붙었다. 내친김에 냉장고 안에서 무르거나 썩어 있기 일쑤인 생강을 얇게 저며 요리용 생강술을 담갔다. 늘 사 먹던 잼 대신 집에서 아이와 함께 설탕을 적게 넣은 딸기잼을 만들고, 오이를 싼값에 넉넉히 사 피클을 만들어 지인들과 나누었다. 이러한 변화는 느리게 진행되었지만 저장 음식을 만드는 기쁨과 자신감을 확실하게 선사해주었다. 고백하건대 이 책을 만들기 전 한 번도 해본 적 없었을 뿐 더러, 해볼 엄두조차 내보지 않던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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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드라마틱한 변화는 냉장고 크기를 반으로 줄인 것이다. 이사할 집 주인이 설치해놓은 빌트인 외문 냉장고를 보는 순간, 가지고 있던 대형 양문 냉장고를 처분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수시로 식재료들을 살피고 냉장고를 정리해왔기에 냉장고를 줄일 수 있겠다는 확신이 섰다.

 

하지만, 막상 이삿날 양문 냉장고에서 외문 냉장고로 음식들을 옮겨 넣다 보니 한숨이 터져 나왔다. 반으로 줄어든 냉장고로 음식들을 이사시키는 일은, 집 평수를 반으로 줄여 이사하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냉동고 크기가 반 이상 줄어들어서 부피를 많이 차지하는 음식들은 넣을 수 없었다. 지난가을 친정엄마가 해주신 사골부터 꺼내 먹기 시작했다. 냉장실은 사정이 나은 편이었지만 먹다 남은 음식을 넣을 자리가 없으니 조리한 음식은 남기지 말고 다 먹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먹을 만큼만 사고, 먹을 만큼만 음식을 만들게 됐다.

 

우리나라처럼 고온다습한 여름을 가진 환경에서 냉장고를 없애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저자 류지현 씨가 전하는 메시지도 냉장고를 쓰지 말자는 게 아니다. 태도의 변화다. 이 책이 먹거리에 대한 나의 태도에 변화를 일으켰고, 냉장고를 줄이게 했다. 냉장고가 작아지자 자연스레 습관이 바뀌었다.

 

하루 대부분을 직장에서 보내지만, 부엌은 일상의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그 시간, 그 공간에 관한 성찰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오랜 시간 부엌은 여성의 공간으로 여겨졌고, 여성과 관련한 대부분의 것들이 그렇듯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 발견된 지식들 또한 하찮게 취급 받았다. 만약 부엌이 남성의 공간이었다면 어땠을까.

 

부엌은 다른 어떤 곳보다 창의적이고 재기 넘치는 장소다. 과학적이고도 철학적인 공간이다. 무엇보다 부엌은 우리 삶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바로 우리가 먹을 음식이 탄생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람의 부엌』은 나에겐 다른 어떤 책보다 유용한 인문서다. 물론 세상엔 교양을 살찌우고 언어에 윤을 내주는 훌륭한 인문서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머리에서 손과 발로 내려가지 않는 독서는 생각은 바꿀지 몰라도 삶을 바꾸진 못한다. 이 책은 조금씩, 하지만 분명하게 나의 일상을 바꿨고, 그것이 시작된 자리가 다른 어떤 곳도 아닌 부엌이라는 데 자부심을 느낀다.

 

누군가가 이 책은 요약 정리가 안 되더라고 했다. 정말 그렇다. 우리 삶이 일목요연하지 않듯이, 전시용이 아닌 진짜 살림을 하는 부엌이 늘 가지런하고 깔끔할 수는 없듯이, 이 책 또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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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우울한 이야기가 또 있을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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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지 <신동아>에서 최우수 르포상을 받은 글이라고 한다. 채널A와 함께 취재해서 다큐멘터리로 방영도 된 적이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렇게 우울한 이야기가 또 있을까 싶다. 아무도 곁에 지켜주는 이 없이 혼자 죽은 남자들의 이야기라니. 원고를 받아들고 유언을 남기지 못하고, 그리운 사람들에게 마지막 말을 전하지 못한 채 그들이 사경을 넘은 장소를 상상해본다. 죽는 순간, 자신의 죽음을 자각하기나 했을까? 그런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 골방이 빽빽하게 들어찬 도시에서 지척에 사람들이 있는데, 혼자 세상을 떠나는 이의 심정은 어땠을까. 죽음의 고통과 혼자 세상을 떠나는 심정 중에 무엇이 더 고통스러웠을까.

 

원고에는 사진이 없었고, 구글을 뒤져서 그런 이들이 떠난 흔적을 보았다. 병원의 하얀 침상 위가 아닌 죽음은 이상했다. 색 바랜 분홍 꽃무늬 이불이나 누런 장판 위에 그들의 마지막 자세가 검고 뚜렷한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책에는 이웃 주민이 외벽에서 수십 마리 구더기 떼를 발견하면서 거기에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챈 경우도 나온다.

 

그런 사람들이 서울에서만 한 달에 스물다섯 명이 넘는다고 한다. 대체 어떻게 살았길래 마지막이 그토록 허망할까. 노숙인이겠지 대개. 아니면 안됐지만 개인적인 불행일 것이다. 처음 든 생각은 그랬지만, 원고를 보면서 '개인적인 불행'에 대한 사회의 책임은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문제는 디테일이다. 시간을 들여 그들의 삶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알아챌 수 없는 사회의 허점이 있다. 그들 중에는 하루를 살아도 사람답게 살고자 했던 사람도 있었고, 단란한 가정을 꾸렸지만 우연한 일로 일자리를 잃고 가정이 해체되면서 거리에서 죽음을 맞은 이도 있었다. 복지제도의 허점 때문에 비극적인 말로로 향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한 죽음에는 '사회적 부검' 같은 것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떠오른다. 다니엘의 마지막 장면만 본다면 안타까운 개인적인 불행만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마지막에 이르는 과정을 보았다면 그의 사인을 달리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실하고 꽤 도덕적인 목수 다니엘은 심장병으로 갑작스럽게 쓰러진 뒤 일을 할 수 없게 된다. 혼자 사는 노인이 먹고 살 방법은 별다른 게 없어서 실업수당을 신청하려 하지만 목수로 평생을 살아온 그에게 복지제도의 벽은 높기만 하다. 수치심을 무릅쓰고 국가의 보조금을 받으려 각고의 노력을 하지만 서민의 진짜 삶을 반영하지 못하는 복지제도는 그에게 절망만을 안길 뿐이다. 보는 사람도 답답해 죽을 지경인데, 당사자는 심장병이 안 도질 수가 없을 게다.

 

다니엘이 실존인물도 아니고, 바다 건너 영국의 현실이지만 그의 죽음에서 이 책의 무연고 사망자들이 겹쳐 보이는 것은 왜일까? 이 책에서 무연고 사망자는 '아무도 시신을 인수해가지 않은 사망자'라는 뜻으로 쓰였다. 물론 다니엘의 경우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죽음에 이른 과정이다. 한 명의 시민으로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살고자 했던 사람의 죽음에 만약 사회의 책임이 있다면 누군가는 그것을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가령 이 책에는 보다 직접적인 증언도 나온다. 오창현 씨(가명)는 고시원에서 혼자 세상을 떴다. 고시원 주인은 그가 떠난 자리를 치우느라 돈 쓰고 손님 놓쳤다고 하소연하지만 그러면서도 오창현 씨의 사정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중략) 수급 받는 사람들이 46만 원 받아서 방값 내고 나면 30만 원 남는데도 일을 못하게 하잖아요. 일을 좀 하면 20만 원이 끊긴다 하더라고. 그럼 나라에서 60만, 70만을 주지. 딱 40만 원만 주니까. 이것만 먹고살라고 하니까. 이런 것도 나라에서 일한다고 돈 뺏지 말고 그냥 일을 할 수 있게 하면 안 되나. 왜 안 되죠? 조금 도와주고 일은 일대로 할 수 있게 하고 그럼 좋잖아요.” 고시원 주인은 “그런 사람들이 다 아프다”고 말한다. 복지제도의 허점은 그들이 가난의 수렁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오히려 막는다.

 

그들은 누구인가? 1998년 외환위기 때 직장을 잃고, 2000년대 초반 구조조정을 당하고, 2008년 금융위기 때 사업에 실패한 사람들이다. “외환위기”와 “대량 구조조정”, “금융위기”는 한국사회의 비극으로 역사에 굵은 글씨로 쓰이겠지만, 이를 감당한 개개인 ‘사람들’의 사정은 누가 들여다보겠는가. 그래서 무연사의 연원을 쫓다보니 20년 전 외환위기가 나왔다는 사실에 문득 놀라고 만다. 혼자 죽은 남자들의 이야기 속에는 한국사회의 굵직한 상처들, 한국 특유의 가부장 문화, 각자도생의 세태의 흔적들이 깊게 남겨져 있다.

 

반쯤은 호기심으로 시작한 취재는 대학생들의 패기와 정열이 더해지며 4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어느 언론사에도 소속되지 않고, 어떤 보상도 약속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만한 노력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귀중하지 않은 원고가 어디 있겠느냐만은, 편집자가 이만큼 많은 땀방울이 배어 있는 원고를 만나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일 것이다. 이제 막 서른이 되거나 서른을 앞둔 저자들이 첫 책의 뜨거움을 오래도록 간직하길, 그리고 오래도록 건필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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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알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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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지지 않는 한 사랑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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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의 사랑, 그리스>의 한 장면

 

한 사람에게 다가오는 사랑의 기회에 관심이 많다. 이제껏 사랑을 몇 번 해봤느냐는 물음을 실없이 던져보기도 한다. 상대는 거의 머뭇거린다. 사랑과 사랑 아닌 것의 기준 설정부터 간단치 않은 거다. 내게 사랑은 나 아닌 것에 ‘빠져듦’ 그리고 ‘달라짐’이다. 우연한 계기로 엮여  서로의 세계를 흡수하면서 안 하던 짓을 하거나 하던 짓을 안 하게 되는 일. 연애가 그랬고 공부가 그랬다. 이전과 다른 삶으로 넘어가는 계기적 사건이 사랑 같다.

 

영화 〈나의 사랑, 그리스〉에는 내 어설픈 사랑 연구에 맞춤한 세 편의 이야기가 나온다. 각기 다른 세대의 이성애 커플이 등장하는 옴니버스식 구성인데 스토리가 촘촘하고 풍성하다. “우린 모두 각기 다른 얼굴이지만 사랑에 빠졌을 때만은 같은 얼굴이다”라는 극중 대사처럼, 그리스의 경제, 외교, 정치 조건에서 그들이 겪는 곤란은 다르지만 나이와 국적을 불문하고 사랑하는 모습은 닮은꼴이다.

 

청년 커플은 그리스 여대생과 시리아 이민자 남성이다. 경제 위기에 처한 그리스인들에겐 기근과 전쟁을 피해 흘러든 이방인은 불청객이다. 정치학을 전공하는 여대생은 수업시간 교수가 말하는 난민 문제에 집중하지 못한다. 그녀에게 난민은 토론 과제가 아니라 만져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민자 남자는 그리스인들 사이에 있을 땐 사회에 불안과 공포를 조성하는 혐오의 대상이지만 그녀와 있을 땐 시리아에서 태어난 순박하고 정의로운 예술가 청년이 된다. 인종이나 계급, 문화의 차이는 차별의 근거가 아니라 사랑의 동력으로 작용한다. 그들은 닥칠지도 모르는 불안에 미리 쪼그라들거나 위험을 계산해 행동하지 않는다. 늘 불안한 눈빛을 보였던 그는 같은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변한다. 그녀 곁에선 천진한 웃음의 존재로 개화한다.

 

중년 커플은 파산 위기를 맞는 그리스 회사 직원과 그 회사의 구조조정 책임자로 온 스웨덴 여성의 사랑을 그린다. 하루하루 실적으로 평가 받는 마케팅 업무의 스트레스와 쇼윈도 부부 노릇에 지친 중년 남자는 공황장애 약을 먹으며 간신히 일상을 지탱한다. 왜 그런 약을 먹느냐며 남자의 나약함을 비웃는 그녀. 사랑에 빠지면서 숫자만 보이다가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자 그녀의 냉정하고 빈틈없는 사고 체계에는 교란이 일어난다. 자본주의의 생리인 신속함과 무자비함을 요구하는 본사의 닦달을 못 이기고 업무를 포기한다. 그리고 그가 먹던 알약 로세프트 50mg을 삼킨다. 이제 남의 밥줄 끊는 일은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노년 커플은 그리스인 평범한 주부와 독일에서 이주해온 역사학자 남자다. 사랑이 잉태되는 공간은 마트. 그녀는 절박하다. 장바구니에 토마토 한 상자를 넣었다 뺐다 할 정도로 생활고가 극심하다. 아직도 싱크대 앞에서 ‘이게 내가 원하던 삶인가’ 한숨 쉰다. 이런저런 고민을 그에게 터놓는다. 서툰 영어로 더듬더듬. 마트 밖은 위험하다고 여기는 그녀를 남자는 신화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녀는 그가 선물한 두툼한 신화 원서를 읽고자 돋보기를 쓰고 영어사전을 편다. 혼자 힘으론 불가능한 말하기, 듣기, 읽기의 세계를 그의 꾸준한 도움으로 통과한 그녀는 자신이 목도한 부조리에 항의하는 사람, 눈치 보지 않고 자기 생각을 당당히 표현하는 사람이 된다.

 

이것이 사랑의 급진성이 아닌가.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사랑에 빠지기 그것은 곧 혁명’이라고 말하는 책 『사랑의 급진성』을 떠올렸다. 한 사람의 이민자가 혐오의 대상에서 환대의 대상이 되고, 해고하는 사람이 해고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공부하지 않던 사람이 공부하는 사람이 된다. “범상한 일상, 새로운 것은 무엇이든 생겨날 수 없게끔 사방에 켜켜이 쌓인 먼지의 단층에 하나의 균열이 생기는 사건”(12쪽)이라는 혁명의 정의대로, 영화 속 주인공들은 사랑이라는 ‘일인분의 혁명’을 완수한다. 한 사람이 바뀌면 세상도 약간 방향을 튼다는 점에서 그것은 역사적 사건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는 또 다른 주인공, 사랑에 무능력한 존재가 나온다. 극우 파시스트 조직에 가담해 유럽 난민에게 무차별한 테러를 자행하는 인물이다. 그는 시대의 불운으로 인한 자기 삶의 실패와 불만족을 이민자 같은 사회적 약자에게 투사하며 혐오의 일그러진 얼굴로 살아간다. 혐오를 뿌리고 혐오를 거두는 악순환의 고리에 갇힌다. 누구나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일상은 비슷할지 모르나 사랑의 있고 없음으로 훗날 다른 얼굴 다른 관계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그는 삶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의 주체로 살아갈 수 있을까.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사랑 아닌가 하는 물음에 『사랑의 급진성』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위험 제로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19쪽) 성적 욕망으로 팽배한 현대사회지만 아이러니하게 사랑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한다며 자기동일성에 안주하는 현대인의 왜소함을 저자는 지적한다. “결과가 어떻든 간에 위험을 무릅쓰는 것, 이 숙명적인 만남으로 인해 일상의 좌표가 변경되리라는 점을 알면서도, 오히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만남을 갈구하는 것”(166쪽)이 사랑이다.

 

사랑에 빠지는 원인은 세 가지다. “첫째는 보는 것, 둘째는 듣는 것, 셋째는 연인의 후한 마음”(19쪽) 영화 〈나의 사랑, 그리스〉의 세 커플도 각각 낯선 사람에게 눈길을 건네는 사소한 행위로부터 사랑이 시작된다. 거기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시간과 정성을 후하게 쏟으며 사랑의 주체가 된다.

 

사랑에 빠지지 않는 한 사랑은 없다.”(151쪽) 사랑은 특별한 지식이나 기술이 필요치 않다는 점에서 쉽고, 자기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점에서 어렵다. 그러니 사랑을 얼마나 해보았느냐는 질문은 이렇게 바꿀 수도 있다. 당신은 다른 존재가 되어보았느냐. 왜 사랑이 필요하냐고 묻는다면, 비활성화된 자아의 활성화가 암울한 현실에 숨구멍을 열어주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존재의 등이 켜지는 순간 사랑은 속삭인다. “삶을 붙들고 최선을 다해요.”(1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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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품격 : 아이는 당신이 보여주는 세계만큼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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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릴 적 미국 동부에 있는 뉴 저지 주에서 살다 왔습니다. 한국에 온지도 어언 햇수로 29년이 지나가고 있는데요. 비록 시간은 상당히 많이 흘렀지만, 그리고 어릴 때의 기억도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한 가지, 제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있는 영어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What do you think?

 

이것은 때때로 다음과 같이 쓰이기도 하지요.

 

What is your opinion?
What are your thoughts?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니는 동안 선생님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표현입니다. 직역하면 ‘너의 생각은 뭐니?’,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지요. 이 외에도 "It's OK(alright)." 등 자주 들어온 표현들이 여럿 있지만 위의 표현만큼 제 머릿속에 강하게 각인돼 있는 표현은 없습니다.

 

중학교 1학년이 끝나가는 시점에 한국으로 돌아와서 중ㆍ고ㆍ대학생 시절을 거쳐 사회에 나온 후 지금까지, 유독 이 표현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동안 한국에서 살면서 제가 갖고 있는 생각이나 의견, 꿈, 욕구ㆍ욕망을 주도적으로 드러냈던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럴 기회 자체가 거의 없었지요. 대학에 들어가고 사회에 나와서는 조금씩 나아지긴 했지만, 특히 중ㆍ고등학생 시절 때는 아예 없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한국에서 중ㆍ고등학생 시절을 보낸 분이라면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5 + 3 = ○
□ + △ = 8

 

단적인 예이긴 합니다만, 교육 방식 혹은 교육의 지향점을 위와 같이 비유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위의 두 가지 등식 중 전자가 그 동안 한국이 지향해온 교육 방식이라면, 후자는 교육 선진국들이 지향해온 교육 방식입니다. 성급한 일반화로 느낄 분들도 있겠지만, 아울러 씁쓸한 건 둘째 치고 크게 부인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나’라는 사람이 갖고 있는 생각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인식을 은연중에 심어온 우리나라의 교육 덕분에 우리는 삶의 자주성과 주도성을 조금씩 잃어온 건 아닐까요.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이나 의견이 주변의 생각이나 의견과 다를 수도 있음을,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남들이 추구하는 길과 다를 수도 있음을, 아예 처음부터 그 싹을 잘라버리도록 훈련되어온 건 아닐까요.
이 이야기가 제가 이 책을 준비하기로 결심한 이유이자 사실상 이 책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 정확히 말해 ‘본질’입니다.


앞서 소개해드린 이야기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 속에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식을 어떻게 키워왔고 앞으로 어떻게 키우고 싶은지, 아울러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어떻게 하는 것이 내 아이를 위해 가장 바람직한지에 대한 해답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들을 이 책에 참여한 해외의 세계적인 석학ㆍ리더들이 이어받아 본인들의 경험이 뒷받침된 이야기를 통해 다시금 여러분에게 던지게 될 겁니다. 좀 더 생생하고 현실감 있게, 무엇보다도 좀 더 와 닿도록 말이지요. 이 과정을 통해 여러분이 아이를 기른다는 것, 그 의미를 좀 더 깊이 있게 되돌아보고 되새겨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면 이 책은 이미 그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고백하건대 이 책은 자식을 키우고 있는 한국의 모든 어머니, 아버지들께 바치는 오마주입니다. 저는 미국과 한국, 두 나라의 교육 시스템을 몸소 경험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느낀 점들이 적지 않기에 나누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았습니다만, 결론적으로는 오랜 기간 실제로 자녀를 길러본 분들 중 자신의 분야에서 업적을 쌓아온, 하여 다방면으로 충분한 전문성을 갖춘 분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것이 상대적으로 더 적절하겠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아무래도 교육에 있어서 연륜이나 내공이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건 아니니까요. 이 책을 해외의 석학ㆍ리더들과 컬래버레이션으로 진행한 이유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진행했던 모든 석학ㆍ리더들과의 컬래버레이션 기획작들을 통틀어 이 책이 가장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작업을 하는 내내, 그중에서도 특히 저와 절친한 석학ㆍ리더들과는 이메일뿐 아니라 화상 채팅과 통화로도 장시간 동안 자녀교육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제 얕은 경험치에 의거해 감히 말씀드리면,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한국과 해외(특히 미국)의 교육환경과 시스템, 상황이 많이 다르기에 어느 쪽이 더 좋다, 나쁘다 단정을 지을 순 없을 겁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해 보입니다. 한국의 부모님들이 가지고 있는 자식 교육에 대한 열의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은 데 반해, 교육 방법과 교육 원칙 등 자녀교육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이나 철학, 접근법 등을 보면 되짚어봐야 할 지점들이 적잖이 눈에 띈다는 것. 

 

저는 이 책을 진행하는 내내 단 하나의 바람을 갖고 임해왔습니다. 우리나라의 입시 지옥과 교육 시스템은 잠시 내려놓고, 적어도 부모라면 자신의 아이를 최소한 이러한 마음으로 대하는 게 맞지 않을까, 이런 방향으로 가르치는 게 온당하고 바람직하지 않을까, 라는 하나의 가이드라인을 부모님들과 나누고 싶다는 바람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부모님들의 마음속에 ‘내 아이를 제대로, 전력과 진심을 다해 잘 기르고 싶다’는 초심(初心)을 환기하고 복원하고 싶었습니다. 그 바람이 조금이나마 전해졌으면 하는 마음 가득합니다.


 

 

최고의 석학들은 어떻게 자녀를 교육할까마셜 골드스미스,알란 더쇼비치,윌리엄 폴 영 등저/허병민 편,기획/박준형 역 | 북클라우드
사회ㆍ경제ㆍ과학ㆍ예술 등 각 분야의 선구자 혹은 권위자라고 불리는 석학들은 어떻게 자녀를 교육할까? 만약 내 아이가 세계적인 법률가, 심리학자, 교육가, 디자이너, 베스트셀러 작가의 자녀로 태어났다면 어떤 교육을 받았을까? 이런 궁금증을 풀기 위해 당대 최고의 석학들이 참여한 ‘한국형 부모 성장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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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에 대해 말하지 말고, 그냥 보여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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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Jukebox The Ghost의 ‘Show Me Where It Hurts’의 솔로피아노 버전을 들으며 아래의 목록을 읽어보자.

 

당신은 숨기는 게 많아
인생에서는 B 짜리 학생
무엇보다도 바그너와 슈트라우스를 흥얼거리는 사람
불법 외인(外人)
정서적 외인
장르광(狂)
황화(黃禍) : 신미국인
침대에서는 훌륭하지
……(20쪽)

 

이것은 이탈리아로 긴 여행을 떠나기 직전, 아내인 릴리아가 케네디 공항의 알이탈리아항공 창구에서 헨리에게 건넨 목록이다. 그녀가 숨기는 게 많은 사람이라고 제일 먼저 꼽은 헨리 파크에게는 이름이 하나 더 있다. 박병호다. 그는 이창래의 첫 소설 영원한 이방인』의 주인공인데, 소설가와 등장인물은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점에서 닮아 있다. 그 남자에 대한 릴리아의 마지막 정의는 그녀가 이탈리아의 섬으로 떠난 뒤 침대 밑에서 발견된다.

 

‘언어를 엉터리로 말하는 사람.’

 

이 정의는 재미있다. 왜냐하면 릴리아는 어린이 대상의 언어치료사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생리적 결함으로, 혹은 그게 아니더라도 발음에 문제가 있는 아이들이 혀와 입술과 날숨을 조작하는 것을 돕는다. 그런 점에서 위의 정의는 헨리 파크 역시 그녀의 관점에서는 치료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생리적 결함이 없는데도 치료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뭘까? 그 이유는 그녀가 작성한 목록 속에 숨어 있다.

 

정서적 불법체류자


‘불법 외인’으로 번역된 ‘illegal alien’은 합법적 비자 없이 미국에 들어오거나 체류하는 외국인을 뜻한다. 실제로는 존재하지만 법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그의 반은 미국에 있고, 다른 반은 미국 바깥에 있을 때 그는 ‘illegal alien’이 될 것이다. 하지만 박병호는 분명히 미국에서 태어났으며 불법체류자가 아니다. 릴리아는 그다음 정의, ‘emotional alien’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위해 이 말을 끌어왔다. ‘illegal alien’ 없이 ‘emotional alien’을 바로 쓰면, 감정을 지닌 외계인을 말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으니까.

 

‘정서적 외인’이라는 말의 뜻은 이런 것이다. 그에게도 감정은 있겠지만 그 감정은 미국 사회에서 유효하지 않을 때가 많다. 마치 실제로는 존재하지만 법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불법체류자처럼, 그가 느끼는 감정들은 일반적인 미국인들에게는 감지되지 않는 것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정서적 불법체류자다. 그가 아무리 영어를 잘한다고 해도 정서적 불법체류자인 한에는 문법적으로 엉망진창인 불법체류자들의 언어와 비슷하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게 바로 릴리아의 진단이다.

 

법률적으로, 그리고 정서적으로 반쯤 가려진, 혹은 지워진 흐릿한 존재라는 이민자 2세의 정체성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소설에서 헨리 파크는 사설탐정사무소에서 일하며 수시로 자신의 신분을 속이는 사람, 즉 스파이로 설정된다. 그가 일하는 글리머 앤드 컴퍼니는 주로 이민자들을 대상으로 정보를 캐내는데, 대개 출신지의 이민자를 담당하므로 헨리 파크는 한국인을 맡는다.


헨리 파크를 비롯한 직원들은 고국의 반란세력을 후원하거나 갓 태어난 노동조합이나 급진적 학생 조직에 자금을 대는 부유한 이민자, 혹은 단순한 선동가, 혹은 양심적 작가나 국적을 버린 예술가를 뒷조사해 배경조사서, 심리 평가, 일일 활동점검표 등을 담은 보고서를 작성한다. 이를 두고 헨리 파크는 “그들의 삶에 대한 소책자, 멀찌감치 거리를 둔 공인되지 않은 전기”라고 말한다. 반면에 일을 시작하기 전에 자신들은 ‘전설’을 만든다. ‘전설’이란 대상인물에게 접근하기 위해 만드는 가짜 정체성을 뜻한다.

 

전설은 우리가 어떤 임무를 맡았을 때 써 내는 것이었다. 이것은 우리가 누구인지 말해 주는 아주 광범위한 ‘이야기’였으며, 그 자체가 하나의 전기로서 종종 아주 세세한 삶의 경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실과 인물을 만들어 낼 정도로 발전해 나가기도 했다.(45쪽)

 

하지만 헨리 파크는 아직 이 업계의 신참이다. 그는 언젠가 회사를 만든 데니스 호글랜드에게서 직장동료인 잭 칼란카코스의 무용담을 들은 적이 있다. CIA와 연루되어 키프로스에서 공산주의 폭도들에게 납치돼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는데 그 일은 1964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사무실에서 가장 노련한 사람인 잭에게는 시칠리아 출신의, 소피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부인이 있었는데, 5년 전 자궁경부암으로 죽었다. 그 뒤에도 잭은 가짜 정체성을 만들어가며 여자를 유혹하는 등의 작업을 계속했다. 헨리 파크는 그런 잭을 보며 의문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이 소설을 끌고 가는 질문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각각은 전문 범죄자의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는데, 이 범죄자는 한 사람이 아니라 줄줄이 이어지는 사람들이었다. 하나의 잭이 키프로스에서 자기를 감시하던 사람을 살해하고, 다른 잭이 오초아-페레스 부인을 유혹하는 식이었다. 우리의 일은 일련의 연쇄 정체성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소피를 사랑하고 땅에 묻은 잭은 누구인가. 이 잭은 이 구도 속의 또 하나의 변형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진정한 영혼인가? 아니면 둘 다일 수도 있을까?(61쪽)

 

질문에 답하는 세 가지 이야기


가끔 소설을 오독하는 독자들이 있다. 그들은 작가가 소설 속에서 질문을 던졌다면, 반드시 그 해답도 제시해야만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추리소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소설은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공들여 쓴 소설일수록 더욱 그렇다. 소설가는 어떤 경우에도 이야기를 만들 뿐이다. 우리는 왜 서로를 오해하는가? 이에 대한 소설가의 해답은 어떤 이야기다. 이야기를 만들었다면 그는 질문에 대답한 것이다. 그러니 소설을 읽으며 해답이 담긴 문장을 찾아 밑줄을 그을 생각은 애당초 하지 않는 게 좋다.

 

이창래는 앞에서 말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세 가지 이야기(이창래 식의 ‘전설’이라고나 할까?)를 들려준다. 첫번째는 이민자 1세인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다. 한국에서는 공대 석사학위까지 받았건만 뉴욕에서는 청과물상회 주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유의, 이제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민 이야기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그들은 결코 미국인이 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두 사람은 전형적인 이민 1세들처럼 돈을 벌어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자신들의 행복을 포기한 사람들이었다. 이것은 박병호의 성장담이다.

 

다른 이야기는 헨리 파크가 자신의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는 이야기다. 헨리 파크는 백인인 릴리아와 결혼해 아들 미트를 낳는다. 이 사랑 이야기는 두 부부가 헨리 파크, 아니 박병호의 아버지를 찾아가지만 않는 한, 특별할 것 없이 행복하게만 보인다. 헨리 파크는 성공적으로 미국 사회에 소속된 것 같았다. 적어도 그들은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자신들의 행복을 포기하는 한국 부모의 전철을 밟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데 그때 부부에게 어떤 일이 벌어진다. 이건 마치 “과연 아이가 잘못되는데도 너희끼리 행복할 수 있을까?”는, 한국인 아버지의 냉소적인 질문에 맞닥뜨린 것과 비슷하다. 과연 어떨까? 말했다시피 소설의 답은 이야기다. 그 명확한 해답 대신에 그냥 두 부부의 이야기에 빠져보기를.

 

세번째는 다음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현 시장에 맞서 출마한다는 이야기가 파다한, 존 강이라는 한국계 시의원에게 헨리 파크가 신분을 속이고 접근해서 신임을 얻는 과정을 다룬 이야기인데, 이것이 이 소설의 메인 플롯이다. 미국 출판계가 주목한 부분도 바로 이 이야기다. 미국 주류 사회에 진입하려는 이민자 1세들의 분투, 그 과정에서 이민자들이 겪는 문화적 차이로 인한 정체성 위기와 인종간의 갈등, 이런 문제를 오래전부터 다뤄온 용광로 국가 미국의 정치적 해법 등등이 이 이야기 속에 녹아 있다. 미국인들에게는 이 문제가 중요하기 때문에 흥미롭게 읽히겠지만, 국내 독자들에게는 피부에 와닿기 어렵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매우 공들여 씌어진 우아한 사유의 문장을 읽는 즐거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내게 그냥 보여주면 되잖아


다시, 처음에 들었던 Jukebox The Ghost의 노래로 돌아가보자. 원래 노래에는 가사가 있다. 이번에는 가사가 있는 버전의 ‘Show Me Where It Hurts’를 들어보자. 한 여자가 동쪽을 향해 방향지시등을 켠다. 해변 쪽으로 나무 잔교가 나 있는 곳이다. 거기에 이르러 그녀는 드레스를 벗고 바다로 걸어 들어간다. 파도가 모든 것을 쓸어갈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때 한 남자가 시동을 끄고 그녀를 향해 달려간다. 그는 무릎을 꿇고 그녀에게 소리친다. 내가 뭘 잘못했어? 내가 잊고 사는 게 뭔지 말해줘.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운다. 그리고 말한다. 어디를 가든 그 일이 나를 따라다녀. 아침에 일어나면 눈앞에 어둠이 펼쳐져. 아무리 아닌 것처럼 해도 안 돼. 하루하루가 지겹고 사는 게 힘들어. 그러자 남자가 말한다. 아픈 곳을 내게도 보여주면 되잖아.

 

나는 앞의 세 이야기 중 두번째 이야기에 마음이 갔다. 어떤 일이 일어나고 난 뒤, 각자의 방식으로 아파하는 두 부부 헨리와 릴리아의 이야기. 여기에 인종적 차이가, 문화적 차이가 있을 리 없다. ‘그 일’이 벌어진 직후, 두 부부는 “자신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 땅에 남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좁고 부서진 것들이었다. 그들은 길고 넓은 군도(群島)에 흩어져 있는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서로를 부를 수도 없고,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서로를 볼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저 입술과 눈이 부풀어오르도록 서로를 거의 죽을 때까지 압박하면서, 눈물이 떨어지기를, 그 위대하고 자유로운 분노가, 그 크고 무겁고 살찐 우울이 떨어져내리기를 자기 자신에게 빌” 뿐이었다.

 

여기에 이르면 언어란 일상적 소통의 도구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본질적으로 파고들면 언어는 무용해진다. 광야의 리어왕은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고 절규했지만, 그걸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소설을 시작하며 헨리를 몇 십 개의 단어들로 규정했던 릴리아도 곧 그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게 언어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정서적인 불법체류자로 규정하는 순간, 그것은 잘못 사용된 언어, 엉터리 언어가 된다. 그렇게 규정된 사람을 오랫동안 관찰해서 보고서를 작성했다고 치자. 그의 삶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의 정체성을 비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게 바로 이야기의 힘이자 스파이로서 헨리 파크가 파국에 이른 이유다. 소설은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에 이야기를 만들 뿐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말하지 말고 보여주라(Show, don't tell)’는 건 소설 창작의 고전적인 조언이다. 이 소설은 학술서에서나 다룰 만한, 미국 이민자 2세의 정체성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과연 어떻게 하면 출신 배경에 따른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고 하나의 인간으로서 우리는 만날 수 있을까? 당신이 소설가라면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맞다. 이야기를 만들면 된다. 더 구체적으로는 장면을 만들면 된다. 이창래가 만들어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장면은 다음과 같다. 소설을 읽을 때는 이런 문장에 줄을 그어야만 한다.

 

우리는 함께 누워 있었지만 몸은 닿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감겨 있었다. 가까스로. 부서질 것 같은 눈꺼풀은 침침한 빛 속에서 유백색이었고 거의 투명했다. 그녀의 얼굴, 목의 열기가 나를 그녀에게로 가까이 이끌었다. 그 가까움으로 인해 나의 두 뺨과 이마의 솜털들이 떨렸다. 늘 나를 사로잡는 것은 접촉이 아니라 가까움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것은 가까이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물러나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닿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그냥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녀에게로 미끄러져 갔다. 나의 얼굴의 온기가 그녀의 얼굴에 반사되어 나오는 것이 느껴질 때까지. 그녀에게서 반사되어 나타난 것은 순간적인 열지도와 같았다. 나는 그녀의 살갗과 뼈의 모든 윤곽, 그녀의 살의 모든 도드라짐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이 말하는 모든 것을. 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을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2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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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도구실의 믹스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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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밥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빨래하는 여자>, 1733년. 당시에도 가난한 여성들이 선택하는 가장 흔한 저임금 노동이 빨래하기였다.

 

10여 년 전이다. 결혼 시장에서는 전성기였지만 노동시장에서는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기껏 내 업무와 관련한 정보를 열심히 준비해서 면접을 보면 “남자친구 있냐”는 질문 앞에서 ‘있는 게 좋은지 없는 게 좋은지’ 머리를 굴려야 했고, 막상 일을 하면 “적당히 일하다가 시집갈 거 아냐?”라는 질문 앞에서 한창 분개하던 시절이다.


나는 새벽에 영어학원을 갔다가 출근하느라 집에서 아침 식사를 못하고 나왔다. 새벽반 수업을 마치고 사무실에 들어올 때, 바쁘고 피곤한 일상이지만 희미한 어둠 속에서 제일 먼저 불을 켜며 적막을 깨는 쾌감이 나름 있었다. 나는 열심히 살고 있어! 이런 기분이 피로를 조금 잊게 해줬다. 그런데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혼자 책상에 앉아 토스트를 먹거나 집에서 간단히 싸온 과일을 먹다 보면 꼭 누군가가 나타났다. 두 명의 중년 여성. 바로 청소하는 분들이다. 한 공간에는 두 종류의 노동자가 다른 시간대에 일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서로 어색했다. 내 입장에서는 ‘청소하는데 가만히 앉아 먹는’ 상황이 어딘가 불편했고, 청소노동자 입장에서는 ‘먹는데 청소하는’ 상황이 난감했을 것이다. 서로 ‘편히 청소하세요’, ‘편히 식사하세요’라는 말을 주고받으며 하루하루 시간이 흘렀고 차츰 서로에게 익숙해졌다. 그들은 가급적 내게 먼 자리부터 청소한 뒤 나의 아침식사가 끝날 즈음 내 자리의 휴지통을 비우고 대걸레로 책상 밑을 쓱쓱 밀고 캐비닛 위의 먼지를 걸레로 닦았다. 자연스럽게 그들은 내게 이런저런 개인적인 질문도 조금씩 했고 우리는 일상적인 대화를 나눴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병이 나서 새벽에 학원도 못가고 엄마가 차로 나를 직장까지 데려다줬다. 천방지축이던 어린 강아지가 따라 나와 내 무릎에 앉혀 놓았는데 처음 차를 탄 강아지가 이동 중 그만 멀미를 했다. 출근한 뒤 바지에 묻은 강아지의 토사물을 지우려고 화장실에 갔다가 청소도구실 안에서 새어 나오는 말소리를 들었다. 잠시 후 문이 빼꼼히 열리더니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나왔다. “아침에 안 보여서 오늘 출근 안 했는 줄 알았는데 출근했네요?” 바지에 물을 뚝뚝 흘려가며 토사물을 지우느라 엉망이 된 내 모습을 보더니 여기서 이러지 말고 안에 들어와서 아예 바지를 벗고 제대로 빨래를 하라고 한다.


청소도구실 안으로 따라 들어가니 대걸레를 빨기 위해 만들어진 개수대가 있었다. 꼴이 우습긴 하지만 나는 바지를 벗어 토사물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어떤 튀는 물건. 각종 대걸레와 약품, 플라스틱 용기와 고무장갑, 쓰레기봉투, 화장지 등이 빼곡히 들어선 좁고 어두운 그 공간 안에 종이컵과 보온병, 노란 포장의 믹스커피 무더기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주머니 두 명이 그 안에서 커피를 마시던 중이었으며 내게도 커피 한잔하라며 타주었다. 종이컵에 믹스커피를 털어 넣고 보온병에 담긴 뜨거운 물을 붓고 노란 믹스커피 껍데기로 휘휘 저었다. 12년 전 그 날, 나는 처음 알았다. 청소노동자들이 화장실 안에 있는 청소도구실 안에서 커피를 마시며 휴식한다는 사실을.


내가 바지를 빨자 아주머니가 받아서 탁탁 털어 아주머니가 앉아있던 그 얼마 안 되는 자리에 널었다. 나는 잠시 아랫도리가 허전한 상태로 아주머니가 준 시커먼 비닐봉지를 랩스커트처럼 두르고 그 비좁은 공간에 뒤섞여 함께 커피를 마셨다. 내가 청소도구실 안으로 들어간 그 순간은 마치 벽을 뚫고 다른 차원의 세계에 들어간 시간 같았다. 이른 아침 그들이 청소하는 동안 나는 아침 식사를 할 때 내 밥상/책상에 먼지 날아들까 봐 조심했었다. 그런데 정작 그들은 우중충한 청소도구 틈에서 굉장히 자연스럽게 커피를 마셨다. 벽장 같은 그 작은 공간의 문밖에는 용변을 보러 드나드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린다. ‘도구실’에는 사람이 있었으며 누군가의 배설 공간이 그들에게는 먹는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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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렘 요셉 라키Willem Joseph Laquy, <바닥을 청소하는 젊은 여자>, 1778년

 

청결한 공간을 만들어주는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정작 청결한 공간을 보장받지 못하는 모순된 현실이다. 청소노동자들이 커피 한 잔 편히 마실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어려운 이유는 결코 물리적 공간의 부족 때문이 아니다. 인간의 존엄이라는 인식이 부족하고 대신 직위에 따른 권위주의만 괴물처럼 발달했다. 한국 대학에서 여전히 이질감을 느끼는 공간은 교수식당이다. 프랑스에서도 미국에서도 아직 대학 내에 교수식당이라는 공간을 보지 못했다.


직원들이 출근하면 자연스레 청소노동자들은 어딘가로 스르륵 사라진다. 청결을 담당하는 사람은 그 사람 자체도 안 보여야 할 의무를 지닌다. 깨끗하게. 이는 여성에게 부여한 성 역할과 비슷하다. (대부분의 청소노동자가 여성이다.) 가정에서도 여자는 계속 쓸고 닦는 노동을 하지만 공적 영역에서 보이지 말아야 한다. 나중에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책을 읽으며 당시 우리 사이를 정의할 수 있는 아주 정확한 언어를 발견했다.

 

“어쩌면 이 세상의 여성들을 종족을 잇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가르는, 아무도 모르는 구분법이 존재하고 그에 따라서 청소부 계급의 여성들은 이제 더 이상 자녀를 생산해서는 안 되는 것인지도 몰랐다. 지금은 우리 사무실 매니저지만 전에는 우리와 같은 청소부였던 태미가 2센티미터도 넘는 긴 가짜 손톱을 달고 몸이 드러나는 야한 옷을 입는 게 어쩌면 그 때문인지도 몰랐다. 자기는 이제 번식녀의 계급으로 신분이 상승했으며 다시는 청소 일에 내몰릴 수 없음을 알리기 위해서.” - 『노동의 배신』, 120쪽


소위 결혼적령기였던 나와 50대 여성 청소노동자, 우리는 바로 “번식녀 계급과 청소부 계급”이었다. 청소부보다 사정이 나은 ‘번식녀’는 ‘선생님’ 소리 들으며 커피 마실 돈은 있으나 ‘된장녀’가 된다면, 번식의 세계에서 멀어진 청소부는 아예 투명인간이 되어 커피 마실 자리조차 없다. 번식녀인 나는 벌어서 ‘스펙’ 쌓기를 반복하며 젊은 날이 지나갔고 밥값을 절약하기 위해 도시락을 두 개씩 싸 왔지만 사무실에서 먹을 수는 있었다. 청소부는 그 자리조차 없다.


봄이 가고 여름이 지났다. 나는 영어학원을 새벽반에서 저녁반으로 옮겼고 자연스럽게 이른 아침 청소노동자들과의 조우는 사라졌다. 문득문득 궁금하긴 했지만 굳이 찾을 생각을 하진 않았다. 어느 날 다른 부서에 갔다가 저 멀리서 나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청소노동자 한 분을 만났다. “아이고, 선생님, 여기서 이렇게 보네요. 우리가 당번이 바뀌었어요. 6개월에 한 번씩 구역이 바뀌거든요. 이제 우리 4층 청소 안 해요. 4층 청소할 때가 좋았는데.... 여긴 (매점이 있어서) 일이 많아요. 쉴 틈이 없어. 인사하러 올라갈까....... 생각도 했는데....... 인사 못 해서 늘 걸렸는데, 여기서 이렇게 보네요. 아무개 여사는 3층으로 갔고, 우리도 찢어졌어. 또 봐요~ 아이고, 인사했으니 이제 좋네.” 컵라면 용기가 쌓인 매점 옆의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쑥 꺼내어 들고 그는 다시 사라졌다.


청소노동자 40만 명. 최저임금을 겨우 받는다. “여자는 시집가면 그만”이라는 사람들은 정작 여자들의 다양한 노동은 보지 못한다. 배설의 공간이 누군가에게 먹는 공간이고, 무책임하게 던져진 내 배설의 흔적을 누군가가 치운다. 인간답게 먹을 수 있는 공간은 지극히 최소한의 요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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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에 담긴 우리 각자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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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닝

 

나선을 품고 있는 높은음자리표,
콧수염을 닮은 파이와 뫼비우스의 띠를 닮은 무한대.
이런 걸 처음 그린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어느 날 무심결에 한 낙서나 끄적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인간이 만든 이 사소하고 아무것도 아닌 기호들은 
그렇지만 우주의 아름다운 비밀을 열어주지요. 

 

기다리는 사람이 문 입구에 나타났을 때
손을 들며 환하게 웃어주는 것.
식당에서 먼저 일어나 신발을 꺼내 신기 좋게 놓아주는 것.
우리 소매를 삶 쪽으로 끌어당겨주는 건
사소하지만 사려 깊은 것들입니다.

 

‘빈 방 있슴’
‘아침식사 됨니다’
밤늦은 객지에서거나, 춥고 허기진 밤의 끝이거나
그럴 때 뜻밖의 위로가 되는 건 이런 말들입니다. 
또 어느 날은 
“밥 먹었어요?” “우리 이러면 어떨까”
이런 말이 난데없이 너무 좋아서 이 세상을 사랑해버리게 됩니다. 
나중에, 그 나중에 가장 사무치게 그리울 것들,
어쩌면 이런 사소한 것들이 아닐까요. 
안녕하세요, 여기는 이동진의 빨간책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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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권의 작품집으로 위대한 SF소설 작가가 된 테드 창.
정교한 기교와 미묘한 감정이 결합된 문장.
그 문장으로 빚어낸 SF안에서의 삶.
테드 창의 작품에는 바로 그러한 우리 각자의 인생이 담겨 있습니다.
'책, 임자를 만나다' 이번 시간에서 이야기 나눌 책은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입니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
인간의 삶의 조건을 해석하는 철학적인 SF 소설

 

1) 책 소개
단 한 권의 작품집으로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과학 단편소설 작가 중의 한 명"이라는 명성을 얻은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 최고의 과학소설에 수여되는 네뷸러상, 휴고상, 로커스상, 스터전상, 캠벨상, 아시모프상, 세이운상, 라츠비츠상을 모두 석권하였다.

 

죽음을 모티프로 한 SF가 있다면 당연히 SF다운 방법으로 삶을 그리는 작품도 있다.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그 성공 예라 할 것이다. 그중 언어학자를 주인공으로 세워 외계 지성과의 조우를 통해 인류가 맞이하는 인식의 변화를 그린 '네 인생의 이야기'는 <시카리오>등을 연출한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 <컨택트>로 만들어졌다.

 

2) 저자 : 테드 창
미국 브라운 대학교에서 물리학과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과학도이자 ‘전 세계 과학소설계의 보물’이라는 찬사를 듣고 있는 소설가. 동시대 과학소설 작가들의 인정과 동시대 과학소설 독자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작가이다. 작품이 매우 드물어 1990년 등단 후 지금까지 발표한 작품이 완성도 높은 중.단편 15편뿐이다. 현재까지 그의 유일한 작품집인『당신 인생의 이야기』에는 그중 8편이 실려 있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전 세계 15개국에 번역 출간되었다.

 

1990년 발표한 첫 단편 「바빌론의 탑」으로 역대 최연소 네뷸러상 수상자라는 영예를 안았으며, 이후 발표하는 작품마다 스터전상, 휴고상, 네뷸러상을 휩쓸며 평단과 독자들의 주목과 지지를 받았다. 「인류 과학의 진화」 등 두 작품이 세계적인 과학 학술지 <네이처>에 발표됐다. 독일 과학소설계의 네뷸러라 불리는 쿠르트 라스비츠상을 수상했으며, 일본 과학소설계의 네뷸러라 불리는 세이운상을 네 차례 수상한 바 있다. 현재 전 세계 독자들의 기대 속에, 2017년 초 출간 예정인 두 번째 작품집의 작업을 마무리하고 있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사고실험의 향연을 통해, 과학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지적 상상력과 소설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철학적 사유를 선사한다. 그중 언어학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다른 외계 지성과의 조우를 통해 인류가 맞이하는 인식의 변화를 그린 「네 인생의 이야기」는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 <컨택트>(2016)로 만들어졌으며, 지성의 향상으로 인한 인식의 변용과 초지능 대 초지능의 대결을 그린 「이해」 역시 영화화가 결정되었다.

 

◆ 221-222회 <책, 임자를 만나다> 도서

 

『13.67』


낯선 나라에서 찾아온 묵직한 소설.
찬호께이의 미스테리 소설 『13.67』은 분명 그런 소설일 것입니다.
홍콩 작가 찬호께이의 이 소설은 1967년과 2013년 사이에 벌어진 여섯건의 범죄 사건이 이어져 이야기를 완성해 나갑니다. 그 속에서 홍콩이라는 특수한 공간이 주는 분위기와 묵직한 메세지까지 즐길 수 있는 이 작품을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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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의 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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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위즈덤하우스 편집자 이소중입니다.

 

책, 고양이, 오후 이 세 단어를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저는 기분 좋은 나른함에 사로잡힙니다. 그 나른함은 한가하고 따뜻하고 충만한 느낌을 주고요.


마치 오늘 소개해드릴 책, 『책, 고양이, 오후』처럼 말이죠.

 

탄산 고양이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전지영 작가는 『책, 고양이, 오후』를 통해 책과 고양이와 함께하는 고요하면서도 자유로운 싱글라이프를 보여줍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낸다는 작가의 일상에는 쓸쓸한 표정이 별로 없습니다.


대신 삶의 매 순간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 애정을 가지려고 합니다. 책을 읽고 고양이를 돌보고 요가를 하는 것도 그런 애정의 일환입니다.


작가는 책을 읽으며 지금 이 순간이 누군가는 평생 바라던 순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요가를 하며 나 자신을 바꿀 수는 없지만 조금씩 노력할 수는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함께 사는 고양이 세 마리를 보며 어제와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아가기도 하고요.

 

『책, 고양이, 오후』에는 일러스트레이터이기도 한 전지영 작가가 직접 그린 그림도 담겨 있습니다. 책 읽는 여자와 고양이 그림들은 지금 이 순간의 애정을 추구하는 이 책의 감성을 더욱 잘 보여줍니다.

 

또한 『책, 고양이, 오후』에는 전지영 작가가 사랑하는 열 명의 소설가와 그들의 작품이 소개되어 있는데요, 프란츠 카프카, 레이먼드 카버, 로맹 가리 등의 이야기는 한 편의 소설이 한 작가의 삶을 어떻게 아우르는지 보여줍니다. 미처 몰랐던 소설가들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이 작가들의 책을 읽고 싶어지지요.


저는 실제로 『책, 고양이, 오후』의 편집을 진행하면서 이 책에 소개된 어슐러 르 귄의 책을 다시 읽어보았고, 어슐러 르 귄이라는 소설가와 좀 더 친해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마, 이 책을 읽는 분들 역시 저와 같은 기분을 갖게 되지 않을까요?

 

『책, 고양이, 오후』의 프롤로그에는 이런 말이 등장합니다.


“누구라도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 혼자가 아니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삶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혼자일 수밖에 없는 독서를 하며 아이러니하게도 소설가 혹은 책 속의 누군가와 소통하고 공감한다는 작가의 말은 평범하지만 매우 인상적입니다. 이처럼 이 책 『책, 고양이, 오후』는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닌 것 같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충만한 시간에 대한 세심한 기록입니다.

 

새로운 계절이 오고 있습니다. 어떤 것은 지고, 어떤 것은 새롭게 피어나겠죠. 사소한 일상을 선명하고 생기 있게 기록한 이 책 『책, 고양이, 오후』는 이런 날에 더 좋은 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오늘에 더 많은 애정이 깃들게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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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은 공적인 장소에서는 슬픔을 감추고 어른답게 행동할 수 있었지만, 아파트에 혼자 있을 때면 감정의 봇물이 터졌다. 사라의 부재를 생각하면 참을 수 없는 비통함이 북받쳐올랐고, 그러면 방바닥에 쓰러져 흐느끼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그는 공처럼 둥글게 몸을 웅크린 채, 꺽꺽거리는 오열에 몸을 떨었다. 눈물과 콧물이 얼굴을 타고 내리고,파상적으로 몰려오는 고뇌가 점점 더 큰 파도로 변하다가 마침내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도저히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정도로 지독한 고통이었다. 몇 분 혹은 몇 시간이 지나면 파도는 사라졌고, 그는 녹초가 되어 잠에 빠져들곤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면 사라가 없는 하루를 또 맞이해야 했다.

닐의 아파트에 사는 나이든 여성은 괴로움은 시간이 흐르면 줄어들 것이라면서 그를 위로하려고 했다. 결코 죽은 아내를 잊는 일은 없겠지만, 적어도 앞으로는 나아갈 수 있게 된다고. 그러면 언젠가는 다른 여자를 만나 행복을 느낄 것이고, 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 때가 오면 천국으로 올라갈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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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인생의 이야기』 (엘리)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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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비슷한 형태의 국기가 많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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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에 그려진 세계사
김유석 저 | 틈새책방

한 나라의 국기 안에는 그 나라의 국가적 정체성이 색깔, 형태 등에 집약되어 나타나 있죠. 김유석 씨가 글을 쓰고 김혜련 씨가 일러스트를 그린 이 책 『국기에 그려진 세계사』는 국기에 담긴 의미를 친절하게 풀어낸 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스페인, 크로아티아, 스위스, 이스라엘, 영국, 아르헨티나, 중국, 한국 등 30개국의 국기에 담긴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왜 그렇게 비슷한 형태의 국기가 많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유럽만 보더라도 삼색기가 정말 많죠. 그런데 그 이유는 프랑스에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담은 삼색기가 유럽에 골고루 퍼져 나갔다는 것이죠. 그리고 또 다른 사례로는 아프리카의 국기 중에도 삼색기가 많은데 그것은 당시 그곳이 프랑스 식민지 였기 때문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식으로 이 책은 지도에 담긴 핵심요소들을 정리하고 역사적 사실들을 풀어가며 해당 국가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쉬운 경어체 문장으로 쓰여있다는 점은 이 책의 장점이자 단점이 될 수도 있을 텐데요. 술술 책장이 넘어가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밀도와 깊이가 그만큼 떨어진다는 점이 단점으로 작용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국기에 대해 잘 몰랐던 역사적 사실들을 부담스럽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은 이 책의 큰 매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존재의 수학
루돌프 타슈너 저/박병화 역 | 이랑

오스트리아 빈 공과대학의 교수인 루돌프 타슈너의 책입니다. 이 책은 인간 존재를 수학적으로 다뤄낸 수학, 물리학, 형이상학 등의 분야의 거인 17명. 그리고 그들의 게임이론을 소설 형식을 가미해서 풀어낸 책입니다. 저자인 루돌프 타슈너는 게임이론의 큰 주제를 모두 17개로 분류합니다. 그것을 각 챕터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데요. 예를 들어 숫자 게임, 우연의 게임, 시스템의 게임 등이죠. 이런 게임 이론들을 소개하기 존 폰 노이만, 파스칼, 괴델, 비트겐슈타인 등 학자들의 업적과 에피소드들을 집중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강점은 가독성이 상당히 높다는 것입니다. 사실 수학 관련 교양서는 아무리 제목에 쉽다라는 말이 붙어 있더라도 막상 읽어보면 읽어내기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큰 장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중간중간 소설처럼 표현해낸 구체적인 에피소드들 역시 흥미로운 점이 많다는 것 또한 집중해서 볼만한 부분인 것 같습니다.

 

 


안미옥 저 | 창비

안미옥 시인의 첫 시집입니다. 개인적으로 허은실 시인의 『나는 가끔 설웁다』를 읽고 방송한 뒤부터 평소보다 더 많이 시집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이번에 안미옥 시인의 이 시집 또한 들어보게 되었습니다. 이 시집에 대해 김행숙 시인은 "덜 말하는 방식으로 더 말하는 시. 그의 시에는 삼켜진, 쟁여진 그리하여 심연으로 내려가는 골을 파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한 층, 한 층 탑을 쌓아 올리는 그런 말. 들끓는 침묵의 언어가 함께한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김행숙 시인의 말이 과연 어떤 뜻이었는지 이 시집을 차분히 들여다봐야겠습니다.

 

 

이달의 Book Trailer

『그래도 괜찮은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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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조용하다고 생각한 소녀가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원래 그런 세상이라고 생각한 소녀는 나중에야 자신만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 싶었던 소녀는 자신 대신 소리를 들어줄 귀가 큰 토끼 ‘베니’를 그리기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자신이 만들어낸 토끼 ‘베니’와 함께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한 소녀에 대한 희망과 그림에 대한 것이다.

 

그녀가 잘할 수 있는 일은 그림을 그리는 일뿐이었다. 조금씩 자신의 그림을 알리고 유명해지기도 한 그녀는 자신 대신 많은 일을 해주는 토끼 ‘베니’에게 감사해하며 유쾌하게 살아간다. 그렇지만 몇 년 전, 그녀는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유전적 병인 이 병은 점점 시야가 좁아지는 병으로 결국에는 아예 보이지 않게 되며 아직까지 치료법도 없다고 한다. 세상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조금씩 맺어가던 그녀는 이제 자신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점점 사라지게 된다는 것에 슬퍼하지만 그 안에서 다시 희망을 찾는다.

 

언제나 유쾌하고 웃음을 잃지 않는 그녀는 매일매일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서 행복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림을 그릴 수 있을 때까지 최대한 많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한다. 빛이 완전히 사라져도 그녀는 계속 그림을 그릴 것이다. 보이지 않아도 마음으로 그녀는 그림을 그려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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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도 아는 만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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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다름의 문제다. 다름과 틀림은 다르다.
틀린 것은 고쳐야 하지만 다른 것은 즐길 수 있다. 커피 취향도 다르지 않다.

 

만드는 사람의 정성과 진심이 담긴 커피는 종류와 가격에 관계없이 모두 스페셜하다.

 

대한민국 만화의 살아 있는 전설 허영만의 데뷔 40주년 기념작 『커피 한잔 할까요?』.
지난 2년간 독자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아왔던 『커피 한잔 할까요?』의 1~8권 완간 세트가 출간되었습니다. 허영만 화백의 또 하나의 전설이 될 『커피 한잔 할까요?』를 오늘 만나봅니다. 식객에서부터 함께 해 오신 스토리작가 이호준 작가님을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Q 『커피 한잔 할까요?』를 한 권 한 권 만날 때마다 주인공인 젊은 바리스타 강고비의 성장만화 같은 느낌이 있어요. 많은 독자들이 공감하며 빠져들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죠. 성장해가는 그를 지켜보면서 하나 하나 같이 배워가는 느낌이랄까요... 실제로 다양한 독자들의 전문적인 피드백이 반영되기도 했죠. 독자들의 피드백 중 가장 기억 남는 것, 또는 도움이 된 것 몇가지만 소개해 주세요~

 

A. 강고비가 성장하는 과정은 저와 허영만 선생님이 성장하는 과정과 비슷한 것 같아요. 저희도 커피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같이 성장해 가는 과정이었죠.
그리고 이 만화는 기본적으로 입문서 수준에서 지식을 전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렇지만 에스프레소 머신을 다룬다거나, 많은 종류의 커피가 등장할 때마다 화실에서는 보다 정교한 작업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작업을 하다보면 방대한 자료들이 섞이기도 해서 몇몇 장면의 실수가 나오기도 하는데요. 그럴때면 독자분들이 바로바로 피드백을 주셔서 수정이 가능했습니다.

 

Q 심층취재! 사실 저도... 『커피 한잔 할까요?』를 연재하기 전 허영만 화백님처럼... 커피 한잔도 못마셔요 ㅠㅠ 완전 문외한이 저도 ‘와~ 디테일하다!!’ 라고 감탄하면서 읽었는데요, 일명 “취재! 어디까지 해봤니” 라고 붙여봤어요. 『커피 한잔 할까요?』를 완성하기 위해 겪은 모험담혹은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다면?


A. 이 작품의 경우에는 커피의 전문용어들이 많죠. 그런 용어들이 처음에는 너무 생소해서 받아 적지만 이해를 하기가 어려웠어요. 일단은 그런 용어와 디테일을 배워나가는 과정이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취재한 내용을 화실에 전달하는 과정에서는 제가 이제 설명을 해야하는 입장이 되기 때문에 더 완벽히 이해를 하고 있었어야 했죠. 그런 어려움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Q  각 권마다 말미에 『커피 한잔 할까요?』의 작업실을 공개합니다 코너를 통해서 각각의 에피소드의 취재일기를 싣고 있죠. 책을 읽는 또 다른 재미이기도 했고, 마무리 같은 느낌도 있었구요. 무엇보다도 상상이 현실이 되는 느낌이어서 가슴이 콩닥콩닥 두근두근~~  이호준 작가님이 좋아하는 커피, 혹은 꼭 알려주고 싶은 원두에 대한 이야기 같은 것이 있을까요?


A. 취재일기는 『식객』의 연장선상이었어요. 작품은 덜어내는 과정이 필요하거든요. 100을 조사하고 취재했으면 95는 덜어내야 하는 것이죠. 그런 과정에서 스토리에 다 담지 못한 이야기들을 알려드리기 위해서 취재일기를 담았던 것입니다.

 

Q 스토리 작가는 다재다능해야 할 것 같아요. 취재를 위한 체력은 기본이고, 파고드는 집요함과 취재원과의 고도의 밀당의 기술, 그리고 박학다식, 깊은 이해력과 진정성 등등... 얼핏 생각해 봐도 필요한 자질이 굉장히 많은데요, 긴 시간 동안 스토리 작가로 활동해 오신 작가님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스토리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을 갖춰야 하나요?


A. 사람에 대한 관찰이 제일 중요하죠. 그들에게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 그런 시각을 어떻게 갖추고 얼만큼 가까이 다가가느냐에 따라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보다 진솔하게 펼쳐질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Q 마지막 질문... 만화를 읽는 게 아니라 공부하는 느낌이다 라는 리뷰 많이 보셨죠? 그야말로 커피 교과서로 자리매김한 『커피 한잔 할까요?』여덟 권 완간본을 소장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A.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은 커피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아요. 정말 조금만 더 알아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시고 즐기는 커피를 보다 즐겁게 접하실 수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다 보시고 지금까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싱글 오리진이나 다른 베리에이션 음료들을 다양하게 즐기시면 이 책을 소장한 의미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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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편없다고 좌절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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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_imagetoday

 

간혹 “글 쓰는 게 너무 형편없습니다. 어떻게 글을 좀 더 쉽게 쓸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왜 나한테 그런 걸 묻는지 모르겠지만 주제넘게 나서보자면 좀 더 쉽게 쓸 수 있는 방법 같은 건, 없다. 있었다면 대번에 알았겠지. 하지만 그렇게 물어보는 형제자매님들에게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세요”라는 식으로 표준전과스러운 대답을 들려주는 것도 마땅치 않아서 나름대로 이런저런 작가들에 관해 이야기하곤 한다. 세계 문학사를 찬연히 수놓은 유명한 작가들도, 이렇다 할 족적 없이 골방에서 쓸쓸히 죽어간 무명의 작가들도 모두들 자신의 글쓰기 방법이랄까 노하우 같은 게 있었다. 해서 오늘은 그 노하우들을 모아 유형별로 분류해 보았다.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 기준에 의한 것일 뿐이니까 너무 엄격하게 따지지는 말아주시길.

 

1.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야만 쓴다는 완벽주의형

 

얼마 전 한국에서 개봉한 영화 <컨택트>가 흥행하면서 원작소설인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집필한 작가 테드 창도 화제가 되었다. 열두 살 때 아이작 아시모프와 아서 클라크의 소설을 읽으며 작가로의 꿈을 키운 그는 ‘바빌론의 탑’으로 역대 최연소 네뷸러 상을 수상하며 단숨에 SF계의 신성으로 떠오른 바 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스물셋, 이후로 20여 년간 발표하는 작품마다 독자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함께 네 개의 네뷸러 상, 네 개의 휴고 상, 네 개의 로커스 상을 받았다. 흥미로운 건 그가 지금껏 쓴 작품이 중단편 15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과작임에도 그는 SF계에서 내로라하는 상을 휩쓸고 독자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다. 어째서일까? 테드 창은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의 창작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대개 흥미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오랫동안 생각해 본 뒤 사색한 내용을 적는다.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 알게 되기 전까진 글을 쓰지 않는다. 즉 쓰고 싶은 아이디어가 있을 때만 쓰고 없을 때는 쓰지 않는 것이다. 나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극히 적다. 무언가를 쓰고 싶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것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어떤 것인지 분명히 하려는 것이고, 그 이야기 방식을 숙련되게 익히는 것이다.”

 

2. 남들이 안 쓰면 내가 쓴다는 독고다이형

 

세이초는 소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였고 마흔한 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데뷔했으며 아쿠타가와 상(은 순문학을 지향하는 작가에게 수여된다) 수상으로 이름을 알렸다. 그런데 어쩌다 추리소설을 쓰게 되었을까. 데뷔하기 전부터 세이초는 “퍼즐 같은 유희로 전락”한 당시의 추리소설에 불만이 많았다. 그는 “유령의 집 가건물에서 사실주의가 있는 바깥으로 (이것을) 꺼내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급기야 자급자족적 차원에서 추리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사회파 미스터리’라는 장르를 탄생시킨 계기가 된다. 이를 기점으로 일본에서는 마니아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추리라는 장르가 “여성을 포함하여” 급격하게 확대되었다. 자연스럽게 ‘추리소설은 어떻게 만들어질까’에 대한 궁금증이나 ‘사회파 추리소설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정의가 필요한 시점이기도 했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따라 세이초는 1958년부터 1961년까지 일종의 글쓰기론을 연재했는데 첫 페이지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글쓰기 훈련을 받아 본 적이 없는 나는, 다만 남들이 가는 길은 걷고 싶지 않았다.”

 

3. 애쓰지 않아도 가만히 기다리면 쓸 수 있다는 안빈낙도형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를 두었고 이혼으로 인해 어머니와 헤어져야 했던 레이먼드 챈들러는 어린 시절부터 일찌감치 생활전선으로 내몰렸다. 단적으로 말해 온기라고는 하나도 없었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을 보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글쓰기에 큰 뜻을 품었을 리 만무하다. 그저 “돈을 벌 수 있겠다 싶은 생각에” 쓰기 시작했다. 이때 챈들러의 나이는 마흔넷이었다. 정황으로 볼 때 그가 소설을 쓰기 위한 문예창작적 노력을 한 뒤에 데뷔작을 썼을 것 같진 않다. 전부터 쭉 읽어오던 탐정 소설들을 보며 ‘이 정도는 나도 쓸 수 있겠다’는 판단 하에, 물론 상금을 받겠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슥슥 써나갔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지 챈들러는 글쓰기에 관한 한 상대적으로 느긋하다고 할지 여유로웠는데『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라는 에세이에 이렇게 적었다.

 

“중요한 건 (글쓰기를 업으로 삼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적어도 하루에 네 시간 이상 일정한 시간을 두고 그 시간에는 글쓰기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다. 꼭 글을 써야 할 필요는 없다. 내키지 않으면 굳이 애쓰지도 말아야 한다. 그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거나 물구나무를 서거나 바닥에서 뒹굴어도 좋다. 다만 바람직하다 싶은 다른 어떤 일도 하면 안 된다. 글을 읽거나, 편지를 쓰거나, 잡지를 훑어보거나, 수표를 쓰는 것도 안 된다. 글을 쓰거나 아니면 아무 일도 하지 말 것. 학교에서 규칙을 지키는 것과 마찬가지 원칙이다. 학생들에게 얌전히 있으라고 하면 심심해서라도 무언가를 배우려 한다. 이게 효과가 있다. 아주 간단한 두 가지 규칙이다.”

 

4. 일단 많이 쓰는 것이 장땡이라는 다다익선형

 

벨기에의 소설가 조르주 심농은 글을 쓸 때면 ‘방해하지 마시오’라는 팻말을 걸고 사무실 차양까지 내렸다. 미리 파이프 대여섯 개에 담배도 채워 두었다. 파이프에 담배를 채우기 위해 글쓰기를 멈추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글을 쓰기 전후로 프로 권투선수처럼 체중을 쟀다. 1989년에 세상을 뜰 때 그가 펴낸 책은 400권이 넘었다. 글쓰기 중독자 아이작 아시모프는 1분에 90단어씩, 하루 열두 시간 글을 썼다. 거의 휴가를 떠난 일도 없는 그는 슬럼프를 경험한 적이 없다고 한다. “살아갈 날이 6개월밖에 남지 않았다면 어쩌시겠습니까?”라는 물음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타자기를 더 빨리 두드려야지.” 아시모프도 400권 이상의 책을 썼다. 스물일곱에 데뷔한 이후로 매년 두 권의 장편소설을 상재하며 “무엇을 써도 걸작을 만들어내는 터무니없는 작가”라는 평을 듣는 미야베 미유키는 작가생활 20년 동안 딱 한 번 슬럼프를 겪었다고 한다. 슬럼프를 어떻게 극복했냐는 질문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단편소설을 하나씩 쓰다 보니 슬럼프가 사라져 버렸어요.”

 

이 외에 “아무런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매일 조금씩 쓴다”는 요령부득형, “좋은 글을 주구장천 베낀다”는 문장복사형, “어떻게 쓸까가 아니라 어쨌든 쓴다는 자세를 늘 유지한다”는 막무가내형 등이 있다. 이런 사례들을 목도하고 있노라면 쓰는 둥 마는 둥 하며 ‘아아 잘 쓰고 싶다’고 바라는 건 욕심임을 깨닫게 되는데 어쨌거나 자신의 글이 형편없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는 없다. 스텐리 엘린 같은 천재작가도 하룻밤에 원고지 여섯 장 이상을 채우지 못했으며 그마저도 형편없다 생각한 대목을 삭제하고 나면 고작해야 세 장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다만 그의 뛰어난 점은 여섯 장을 썼다가 세 장으로 줄이는 작업을 매일매일 했다는 거다. 결국 이 ‘매일매일’이라는 대목이 중요한 게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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